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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의견 | 《사대부의 삶》을 쓰는 중 해결되지 않은 의문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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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호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04-23 16:00 조회399회 댓글2건

본문

참봉공후 박호우입니다.

 

게시판에 글을 올린다고 문제가 풀리는 것도 아니고, 몇 명이나 이 글을 읽을지도 알 수 없지만, 

종중 분들만큼 반남박씨의 문중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없다고 생각이 들기에, 지난 몇 년간 책을 쓰며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점 몇 가지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시간을 내서 한번쯤 충분히 고민해 볼 문제들입니다. 

 

1)  어찌하여 여말선초 인물들(ex.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목은 이색, 둔촌 이집, 윤소종, 권근 등)의 문집에서 반남선생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가?

(일전에 남계선생 박세채께서도 같은 고민을 하신 기록이 남계집에 있습니다.) 

 

목은집과 같은 巨帙(거질)의 문집에서조차도 반남선생이나 선생의 부인에 대한 시를 찾을 수 없다. 반남선생은 목은과 동방급제를 하였고, 한산이씨 가정 이곡 家의 맏사위인데 어찌하여 시문(詩文)을 교류한 기록이 없을까? 목은집의 편집과정에서 빠진 것일까? 원래부터 교류가 없던 것일까? 

혹 반남선생이 처가살이를 해서 같은 집에 살았기 때문에 굳이 따로 시문을 주고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 

 

2) 밀직부사(박수)는 언제 돌아가셨을까? 평도공은 첫번째 부인 노씨(盧氏)와 왜 이혼하셨을까?

 

1373년 발행된 계축호적에 의하면, 밀직부사는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남)하신 걸 알 수 있는데, 그 이후로 기록이 묘연하다. 과연 밀직부사께서는 1374년에 맏며느리 상(喪)을 보고 가셨을까? 1375년에 맏아들의 죽음을 보셨을까? 이후에 손주(박은) 손녀(박은의 누나)의 혼서(婚書)는 누가 썼을까? 

 

또한, 평도공의 첫번째 부인이 노씨라는 기록은 유백유가 쓴 반남선생 행장에 나오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다"고만 나오고 노씨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다른 언급이 없다. 남계선생이 편찬하신 《숭효록(崇孝錄)》에 노씨부인에 대한 기록이 추가적으로 나오는데, 필자의 기억으로 아마 죽창공(박원도)를 통해 남계선생이 듣고 기록한 내용이다. 노씨는 평도공과 이혼한 뒤에 평도공의 벗과 다시 재혼하였고, 그 친구는 정승이 되었으며 노씨와 슬하에 후손이 극히 번성하였다는 기록이다. 

 

(남계선생은 쓸 데 없는 기록을 남기실 분이 아니므로, 후손들에게 이 부분에 대해 고증을 해보라는 숙제를 남기신 듯 하다. 고로 필자가 조선초 정승, 판서 중에 교하노씨를 부인으로 둔 사람이 있는지 부단히 찾고 있지만 아직 찾지 못하였다.)

 

3) 평도공의 제사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모셨는가? 얼마나 많은 재산이 상속되었는가? 타락산 아래 백림정(柏林亭) 종택은 어디갔는가?

 

(제가 본 문헌의 기록에, 세양공 종손 용인현령 박제윤(朴齊崙)의 말에 의하면, "평도공의 기제사는 종손 참판공집에서 받들고, 묘제는 세양공 집에서 받들고, 평도공의 영정은 부윤공 집에 모셨다. 그러나 이 영정은 병화로 소실되었고, 그 후 부윤공의 자손들은 끝내 영락하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평도공의 불천지위는 차치하고, 통상적으로 한 인물의 자손들은 최소 그 현손자들의 대(代, 즉 4대)까지는 제사를 위해서라도 상호 교유를 하는 법입니다. )

 

그런데 소고선생의 문집을 보면 호군공(박병중)의 증손인 박이경과 판관공(박병균)의 증손인 박승임이 사마시에 합격을 한 뒤에라야 비로소 성균관에서 처음 만나 반가워하며 시를 주고 받는 기록이 있는데, 전주와 영주에 살던 반남박씨들은 서로 교류가 없었나? 멀어서 평도공의 제사에 못갔던 것인가? 종택은 어느 시점에 딸에게 상속되었을까?

 

4) 어찌하여 소고선생 박승임의 종손家는 노론(老論)이 되었는가? (최소 1600년 중반부터 1700년대 중반 인물들까지)

 

작년에 소고선생이 영남지역 정체성 형성(서원건립운동을 중심으로)에 미친 영향에 대해 논문을 쓰다가 발견하고 매우 당혹스러웠던 점인데, 육우당 박회무 선조의 두 손자 중에 맏손자인 참봉공 박충기의 장남 박문린이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현감 홍가상 등 그 사위들도 또한 노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손자 박태래도 또한 노론의 도암 이재 등과 교류한 기록이 있으며, 증손 괴천공 박홍준의 묘갈을 한수재 권상하(우암의 수제자)의 증손인 산수헌 권진응이 지었습니다. 최근에 박태래의 사위 관찰사 강윤의 《법천집(法川集)》을 읽어보니 그는 당색 구분 없이 영남의 남인들, 한양의 미호 김원행 등과 교유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남에도 많은 수의 노론이 있었다는 연구가 있긴 하지만, 아직 학계에서 별로 연구되지 않은 주제입니다. 

 

오늘날 소고선생이 학봉이나 서애, 월천, 한강 등에 비해 퇴계의 정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혹 영남 내에서 이러한 외도(外道)(?)를 좋지 않게 봤던 까닭인가?

 

5) 선조들의 고문헌(문집), 고문서(분재기, 일기, 간찰(편지), 토지문서 등)는 다 어디갔을까? 

 

문집들이 실제 망실된 것인지, 필자가 능력이 부족해 찾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반남박씨 문집 중에 당대의 기록이 있으나 현재 찾아볼 수 없는 대표적인 것은, 

병조참판 박종정(朴宗正)의 《성선고(醒仙稿)》(반성부원군 후손),  좌승지 박희진(朴熙晉)의 유고 4권, 박광순(朴光淳)의 유고 2권 (이하 상주공 후손), 

무취옹 박필기(朴弼琦)의 유고 3권 (길주공 후손),  군자감정 박사백(朴師伯)의 유고, 진사 박풍서(朴豊緖)의 유고 (이하 서포공 후손), 박경수(朴慶壽)의 유고 (오창공 후손),

예조판서 박주수(朴周壽)의 유고 (참봉공 후손),  비안현감 박사걸(朴師傑), 박사유(朴師儒) 형제의 유고 (이하 활당공 후손), 우초공 박시수(朴蓍壽)의 유고 (남일공 후손), 

등이 있는데, 이 분들의 문집이 망실되면서 이 분들이 집안 사람들의 위해 쓰신 수십개의 묘도문, 시문(詩文)이 함께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필자가 가지고 있는 분재기는 고작, 감정공(박응천)의 막내 딸이 조카 동추공(박환), 조카손자 승지공(박세성)에게 증여한 분급문기, 소고선생의 자녀들의 화회문기, 판관공 종손 박승장의 딸의 분재기, 판관공 후손 어떤 미망인 할머니의 분재기, 송담공 박태원의 분재기, 통덕랑공 박필이의 장인 분재기 등 뿐입니다.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있는 걸로 만족하고 살아야 하는가?

(이외에도 무수한 숫자의 유적들이 산실되었지만) 이제라도 어디선가 발견된다면 읽고 공유해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6) 반남박씨 중 평도공 자손을 제외한, 춘당공 박맹지, 직장공 후손 도소재 힐 이하 임회공 박희권 가문들의 문헌들은 어디까지 소급 할 수 있을까?

 

춘당공 박맹지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여러 사료를 통해 고증이 가능한 분이며, 그 분이하 자손들이 함양의 남계서원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1910년에 뒤늦게 간행된) 박문영의 《용호집(龍湖集)》과 같이 교차검증이 가능한 문집이나 묘도문이 여럿 존재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춘당공의 조상을 "밀직부사 박수의 동생 박려"로 소급할 확실한 문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조선 시대 때도 많은 의문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 

 

금산의 박씨들의 조상인 도소재 힐, 임회당 희권의 경우, 1916년에 간행된 《임회당선생실기(臨淮堂先生實記)》를 대표적인 문헌으로 꼽을 수 있는데, 초려 이유태가 쓴 박희권 행장은 큰 문제가 없지만, 임회당 본인이 쓰셨다고 되어 있는 부군(초산군수 박인)의 묘지 초반부에 "문정공( 文正公) 반남선생 운운"하는 부분은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432년에 태어나 1496년에 돌아가신 임회당 선생이 어떻게 1682년에 추증된 반남선생의 시호를 글에 인용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외에도 호군공의 손자 박찬(朴儹) 선조의 묘갈명 마지막에 "영력(永曆) 경자(庚子, 1660)년 후 14년 갑인(甲寅, 1674)년 중춘 모일에 승지 경주 이시발이 행장을 찬하였다."는 부분도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 1626년에 죽은 벽오 이시발이 박찬의 8대손 박후계(1655년생)의 부탁을 받아,  그의 아버지 학생공(박만고, 1631-1685)이 찬한 가장(家狀)을 보고 글을 짓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이 지은 것 같은데, 왜 이시발이 지은 글이라고 했을까?

 

결론 : 고문헌이란 읽으면 읽을 수록 모르는 게 더 많은 듯 하고, 이전 사회를 이해하는 현대인들의 통념이 얼마나 부정확한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댓글목록

더브러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더브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는 8세 호군공의 종손입니다.
호우 족손님의 이름은 반남박씨 종친의 단톡방에서 들었고 인터넷 영상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 박사와의 대담
"MZ세대 젊은 학자가 본 한국사"에서 한국사 및 반남박씨 문중에 대한 지식의 깊이와 해박함에 같은 반남박씨
로서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꼈고 위글의결론에서 문중 및 역사에 대한 호우 족손님의 열정과 겸손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호우 족손님께서는 선조들에 대한 사료의 부족과 그에 따른 현대인의 통념의 부족을 한탄하지만 우리로서는 호우 
족손님의 글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료가 부족하여 포괄적인 주제로 글을 쓰기가 뭐하다면 예를 들어 "반남선생의 일생- ...을 중심으로-" 등으로 가지고 있는 자료만으로 충분히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한문의 해석에 있어 애매모호한 점이 있으면 우리 문중의 한문 대가들(중고등학교의 한문선생님을 포함하여)
과 소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깊은 연구와 해박함에 경의를 표하며 님이 썼거나 쓸 예정인 책이나
글을 통해 많은 종원들의 문중과 그 역사에 대한 인식과 지식이 깊고 넓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대종중 차원에서도 호우 족손님과 같은 문중의 역사학도에 대한 물심 양면의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참고삼아 마크 피터슨 박사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크 피터슨 (Mark Peterson 1946~) 한국학 박사
한국어와 한문에 능통하다. 미국의 브리검 영(Brigham Young)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하바드(Harvard) 대학
에서 한국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브리검 영에서 30년 이상 한국사를 가르쳤다. 유튜브 채널 "우물
밖의 개구리 (The Frog Outside the Well) 한자로 정외지와(井外之蛙)"를 운영하고 있다.

호우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호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연구를 통해 선조들의 삶과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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