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도’는 역시 독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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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1:12 조회2,022회 댓글0건본문

서계 박세당 울릉도 원본.jpg

독도.jpg
해양수산개발원 유미림 박사, 조선후기 박세당
이 쓴 자료 발굴
“울릉도에서 정상 안오르면 우산도가 보이지 않아”…
‘우산도가 울릉도’라는 日 주장 뒤집어
유석재 기자
독도 영유권에서 커다란 쟁점이었던 ‘우산도(于山島)가 독도’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가 발굴됐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독도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인 유미림(柳美林) 박사는 최근 이 개발원이 발간하는 ‘해양수산동향’ 1250호에서
“조선 후기 박세당
(朴世堂·1629~1703)이 쓴 ‘울릉도’를 분석한 결과, 우산도는 울릉도가 아닌 독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독도가 원래 우리 땅’이었다고 할 때 그 중요한 근거는 우산도(于山島)의 존재였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이 울진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무릉’이 울릉도, ‘우산’은 독도라는 것이 한국 학자들의 해석이었다.
하지만 일본 학자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주석에 “우산도와 울릉도가 본래 한 섬이었다는 설도 있다”는 내용을 근거로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①울릉도이거나
②울릉도에서 동쪽으로 2㎞ 남짓 떨어진 죽도(竹島)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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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 박사 등이
조선 후기 주요 학자 중의 한 사람인 서계(西溪) 박세당
의 기록 ‘
울릉도’를 분석한 결과는 달랐다.
이 글은 박세당의 11대 후손이 2001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한
‘서계 종택 고문서’ 중 ‘서계잡록’에 실려 있는 필사본으로,
지금까지 사료의 존재가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박세당은 이 글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에 갔다가 돌아온 승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대개 두 섬(울릉도와 우산도)이 그다지 멀지 않아 한번 큰 바람이 불면 닿을 수 있는 정도다.
우산도는 지세가 낮아, 날씨가 매우 맑지 않거나 최고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울릉도에서) 보이지 않는다(不因海氣極淸朗, 不登最高頂, 則不可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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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①‘우산도’는 분명 울릉도와 같은 섬이 아니라는 사실과,
②죽도나 관음도처럼 울릉도와 인접한 섬도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죽도·관음도는 울릉도에서 높이 올라가지 않거나 날씨가 흐려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산도’가 될 수 있는 섬은 독도밖에는 없다.
이는 박세당
과 동시대 인물인 삼척영장 장한상(張漢相·1656~1724)이 쓴 ‘울릉도 사적’에서 “(성인봉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 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록과도 통하는 것이라고 유 박사는 설명했다.
박세당
과 장한상은 모두 일본측으로부터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확인을 받은 숙종 때의 어부 안용복(安龍福)과 동시대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인식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처음 발굴된 것으로, 독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밝히는 매우 훌륭한 자료”라고 말했다.
서계 박세당
자(字) 계긍(季肯) 호(號) 서계(西溪)
조부(祖父) 좌참찬 동선(東善)
부(父) 이조참판 정(炡)
현종1 (1660) 증광문과에 壯元
1664 부수찬으로서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고
1667 수찬을 거처 이듬해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취임치 않아 장형을 받고
1668 동지사 서장관 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예조 형조의 참의를 지낸 후
숙종20(1694) 갑술옥사에 소론이 중용 되자 승지에 특진 했다
1670 공조 판서를 거쳐 이조 형조의 판서를 역임
1703 판중추부사로 기로소에 들었다가 사변록을 저술하여 주자학을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함으로서 反朱子라 하여 사문난적의 낙안이 찍혀 관작을 삭탈 유배 도중 옥과 에서 죽었다.
즉시 사직 이인엽의 상소로 신원 되었다 이중환 안정복 등보다 앞선 시대의 실학파 학자로서 농촌생활에 토대룰 둔 박물학의 학풍을 이룩했다. 글씨를 잘썼다
그의 근본사상에 대하여는 유학의 근본정신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는 견해가 있고,
주자학은 물론 유학 자체에 회의하여 노장학(老莊學)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근본입장이 당시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태도에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는 데는 이론이 없다.
이 있었고, 그들의 입장도 주자학에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반성이 싹튼 것은 16세기 뿐만이 아니라, 17세기 우리나라의 사상계는 국내외적 시련에 대한 극복을 위하여 사상적 자주의식이 제기되어 이의 수정과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세기에 비롯하였지만, 주자학에 대한 정면도전이 표면화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의 열렬한 신봉자들인 송시열 등은 주자학 비판자들을 사문난적이라 하여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이러한 배척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그와 윤휴(尹휴)․윤증(尹拯)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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