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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회 반남박씨 교양강좌 (인물로 본 반남박씨의 종사(宗史 1)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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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8 13:44 조회2,057회 댓글0건

본문

인물로본 반남박씨 종사.hwp


반남박씨가 예로부터 한국의 명문거족의 하나로손꼽히고 있다.
호장 박응주를 득관시조로 하고,

시조 호장공 응주는 혁거세의 혈손으로 전하고있으나,
상계가 실전 되어 정확한 계대를 상고할수없다.
그는 고려고종때 반남현의 호장을 지냈으며 반남을 관향으로 삼은 것은 공민왕 22년(1373) 밀직부사 박수의 계축호적에 의한 것이다

반남은 전라남도 나주목의 속현으로 현재는 나주군반남면으로 되어 있는바 이곳은 원래 박씨일문의 토착지였고 그래서 5세 박상충을 당시학자들은 반남선생 이라고 호칭하였다. 반남박씨가 고려말에 중앙관계에 등장한것은 이미
    
2世 박의가 급제 하면서부터인듯하다 (※기인(其人)제도)

3世 윤무는 양온령동정.     환무는 직장을

4世 수는 밀직부사 상호군 려는 금성현장을 지냈다 그러나오늘날 반남박씨가 한국의 명문으로 자리잡은 것은

5世 박상충, 상진, 상경 삼형제가 나란히 문과에 올라서,    상진은 판서, 상경은 직장을역임
     상충이 공민왕때 문과에 올라 예조정랑을 거쳐 판전교시사(전교시의으뜸벼슬로 정3품벼슬)를 역임했고 경사와역학에 밝아 아들 은과 함께 가문의 중흥을 이르꼈다

6世 은이 조선초 왕자난때 태종을 도와 공을세우고 좌명3등공신으로 반남군에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반남으로하여 세계를 이어왔으며

7세 형조참판을 지낸 규, 공신인 강. 경주부윤을 지낸 훤

8世 숭질(7世 萱의 차남)은 세조때 좌의정을 지냈고 연산군의 폭정을 개탄하여 일부러 말에서 떨어저 부상을 입고 벼슬을 버림으로서 중종반정이후 정치적 보복 속에서도 화를 면할수있었다

9世 한편 청백리(淸白吏) 강(薑)의 손자인 용(墉)은 은율 현감(殷栗縣監)으로 있을 때 한 소녀를 끼고 용을 탄 채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딸이 세자빈(世子嬪: 인종비)으로 간택되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올라 금성부원군(金城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진산군주를 지낸 린(초산공) 구천향현사(龜川鄕賢祠)에 배향된 맹지(춘당공=반남박씨중 조선조에서 첫문과급제자)

10세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 예조정랑을 지낸 억년,
아우 조년은 세자시강원 설서로 연산군의 스승이며,이조정랑을 지내고
박희권은 린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단묘(端宗)의 충신으로 선조 도소재 힐과함께 반남박씨 충의 삼세로 삼세충비가 세워졌다.

11世 朴紹는 중종조에 사간을 지내고, 紹는 의 6세손으로 학식과 문명이 뛰어나 조광조를 비롯하여 신진 사류들과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했고 조광조와함께 왕도정치의구현을 시도했던 16세기 사림의 대표적인물 그는 을묘 현량과에 추천되고도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등과하여당시 조정을 놀라게 했다.
간신(奸臣) 김안로(金安老)와의 싸움 으로 일생을 살았다. 紹는 슬하에 아들 5형제를 훌륭하게 키움으로서 이들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소고 박승임은 이황의 제자로 선조2년 동지사로 명나라 다녀온 뒤 황해도 관찰사 ·도승지(都承旨)·춘천부사(春川府使) 영주(榮州)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12世 반남박씨의 가세를 크게 떨친 왕자사부 응천, 반성부원군 응순,대사헌 응남, 대사헌 응복, 도정 응인은 박소 의 아들오형제 다.
    
박손은임진왜란때 창의 하여 토적 하다가 순절하여 후에 정려를 받음

13世 선조의 비 의인왕후,
宣祖朝의 名臣 朴東賢, 東善 형제. 사재감정 응천의 아들 동현(東賢)은 석학(碩學) 이율곡(李栗谷)과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학행(學行)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천거되고 선조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올랐으며,
그의 아우 동선(東善)은 선조때 남포현감(藍浦縣監)으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인조반정 후 대사간으로 등용되어 이조 참판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충익공 東亮, 東說 형제는 朴應福의 아들 이다 동열은 선조조에 문명이있었고 동량은 약관에 임진왜란 맞나 의주로 선조를 扈從하여 대소국상에 주선한 바 많았다

14世 광해군의 난정 속에서 함경도 병마 절도사로 나갔던 엽(燁: 참봉 동호의 아들)은 성지(城地)를 수축하여 방비를 굳게 했고,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규율을 확립,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진력하여 외침에 대비했다. 당시 權臣이었던 이이첨(李爾瞻)도 그의 명성에 눌려 굴복했을 만큼 명망이 높았다

    충숙공 朴炡(東善의 아들)은 仁祖反政功臣으로 광해군의 난정을 일소하고
    선조의 다섯째 딸 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던 미는 좌참찬 동량의 아들로 인조 때 사신(使臣)이 되어 청(淸)나라에 다녀와 금양군(錦陽君)에 개봉되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로 유명했으며,

용호공 박문영은 선조 39년 丙午生員 에 합격하였다.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享 山靑 西湖 卿賢祀    

15世 참판(參判) 정(炡)의 아들로 현종 원년에 문과에 장원(壯元)했던 세당(世堂)은 숙종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저서인 사변록(思辨錄)을 통해 주자(朱子)의 사서주해(四書註解)중에 불합리한 점을 비판하고 자기의 독자적인 이론을 내세운 것과, 이경석의 신도비명에서 兩者(이경석과 우암송시열)를 봉황과 올빼미에 비겨 송시열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어찌면 이는 박세당만이 할수있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론들은 이를 그냥 두고 보지않았다. 그결과로서 박세당은 사문란적으로 낙인찍혔고. 이경석의 신도비는 25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어야했다.
    
<황극탕평론>을 펼쳐 당쟁을막으려한 대학자로서 조선 예학(禮學)의 거두(巨頭)인 文純公 세채(世采)는 반남 박씨가 자랑하는 인물로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1631년(인조 9) 영의정(領議政) 신흠(申欽)의 외손자로 태어난 세채는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고, 당쟁이 격렬했던 숙종조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당파를 초월하여 당쟁완화에 진력했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육례의집(六禮疑輯)남계예설(南溪禮說) 등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16世 대제학 朴泰尙은 박炡의 손자로 泰尙이 정시문과에 壯元하여 여러관직을 두루거치고 西人의 중진으로 명망이 높았다

     태보는 기사환국(己巳換局)때 서인(西人)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화(禍)를 당했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둘째딸과 혼인한 금창부위(錦昌副尉)가 경적(經籍)에 묻혀 학문이 특출하게 뛰어났다

17세효종의 딸 숙녕옹주(淑寧翁主)와 결혼하여 금평위(錦平尉)에 봉해진 필성, 이인좌난의 평정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이 되어 금릉군(錦陵君)에 봉해진 필건(완소(緩少)계열로서 조문명송인명(宋寅明) 등이 주도했던 탕평책에 적극 동조하였다.)

우리 시조 戶長公의 墓와 진사공의 표석은 옛날에 表石이었는데 平度公 이 세운 것으로서 오래되어 稀微해져서 己丑年(1709)에 17世孫 弼明이 새로 墓表를 세우고 옛 碑石은 外階의 西邊에 묻음.
우찬성(右贊成) 등을 역임한 산림출신의 필주

18세 박사임(朴師任), 【우참찬 이치중(李致中)이 청백리로 추천하였다.】,
     집의 박치륭(朴致隆)【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청백리로 추천하였다.】,
     정(正) 박사백(朴師伯)【형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이 청백리로 추천하였다.】,

     박사수를 이인좌의 난때 영남 안무사(嶺南按撫使) 겸안동 부사(兼安東府使)로 삼았다.(감란록을 지음=이인좌(李麟佐)의 난 의 전말을 기록한 책)

19世 조선후기에 <熱河日記>와 <許生傳>을 쓴 실학자의거두 燕巖 朴趾源을 비롯여
도원은 英祖 38年 壬午(1762년)에 本道(전라도)에 按察使로 왔을 때 호장공 묘역 排石 望柱石을 다시 갈아치우고,
명원은 영조의 제3녀 (和平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성위(錦城尉)에 윤원은집이 가난하여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끝내 벼슬하지 않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당시 소개되던 서학(西學)의 폐해가 도교나 불교보다도 크다고 하여 배척하고 오직 경전의 훈고와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중요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준원은 그의 제3녀가 수빈(綏嬪)으로 뽑히고,1800년에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에 의하여 호조형조공조의 판서와 금위대장(禁衛大將 등 삼영(三營)의 병권(兵權)을 8년 동안 잡았다.(준원은 윤원의 아우)

20세 현목수비 박씨의 아버지는 좌찬성 준원(準源)이며, 정조의 빈이 되어 순조와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다. 왕자를 낳은
뒤 왕자를 낳지 못하는 왕비를 위로하고 공경하니 온 궁중에 화기(和氣)가 가득하였다. 행실이 착하고 예절이 바를 뿐만 아니라 평소에 말이 적으며 의복과 일상용품들을 극히 검소하게 하니 조야에서 현빈(賢嬪)이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아첨하는 무리들이 그에게 은밀히 귀중품을 진상하였다가 의금부에 잡혀간 일도 있었다.
고종 38/10/11(양력) / 현목수빈을 수비로 높여 봉하다.

42세에 이조판서가 된 종덕으로서 무려 18번이나 이조판서에 올랐다.관료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관직으로서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어야 하는만큼 그는 공평한 인사에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판서직을 통털어 가장 많이 지낸 인물로 박종래로서 이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5조판서를 돌아가며 총 15회 지냈다.(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20회 판서를 지냄)
훈련대장을 지낸 종경(宗慶). 우의정 박종악(朴宗岳). 박종훈(朴宗薰)을 좌의정으로 삼았으며

21世 朴珪壽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美 商船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들어와 행패를 부리자 군사를 동원하수여 그배를 불살라 버리고, 조선조 벼슬아치중 맨처음으로 개화상상에 눈 떳다. 그의 사상이 박영효 김옥균에 이어지고 더욱발전하여 독립사상 으로 맥이 이어짐. 우의정을 거치면서 당시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치던 대원군에게 천주교의 박해를 반대하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박주수는 훈련대장 총융사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박회수는 우의정을 거쳐 1859년 좌의정에 이르러

23世 대한제국초대 주미전권공사를 지낸 朴定陽은 후에 김홍집내각이 붕괴되자 내각총리대신이됨
박성묵 의병을 일으켜 경희백(慶希伯)과 함께 강원도에서 활약하였고, 이듬해 강원 횡성(橫城)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독립운동가 박진양(朴震陽)

24世 朴泳孝는 철종의 사위로 개화파의 지도자로 김옥균과 개화당을 만들었다
     박승희는 정양의 아들로 토월회를 조직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연극활동을 하고
박승빈 국어학자로 보성전문 교장을 지내고 1931년 조선어학연구회를 조직하여 주시경(周時經) 계통의 학설을 반대하고

25세 朴重緖 평북 박천(博川) 출생(?부윤공파?). 1920년 대한독립단에서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암살을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한 민양기(閔良基) 일행의 권유로 대한독립단에 입단

26세 박찬익 박영준 부자의 임시정부 법무부장과 한국광복군 제3지대 훈련총대장 등을 지내며 항일운동을 벌였다. 박찬웅
은 대구사범학생 중 일제에 항거하다 옥중순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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