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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窩公 박태항의 ‘그 마음의 소재는 길가는 사람도 안다’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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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6-05 09:15 조회3,5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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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窩公 박태항의 ‘그 마음의 소재는 길가는 사람도 안다’ 상소

[이덕일 사랑](375) 길가는 사람(路人) 역사평론가
                 조선일보 2008.4.23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속셈을 "그 마음은 길가는 사람도 안다"라고 표현한다.
노인개지(路人皆知), 또는 노인소지(路人所知)라고 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삼소제(三少帝)편의 주석(註釋)은 위나라 임금 조모(曹?:241~260)가 상서(尙書) 왕경(王經) 등에게 왕위를 위협하는 사마소(司馬昭)를 비판하며 "그 마음은 길가는 사람도 안다(路人所知也)"라며 토벌을 명했으나 되레 사마소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집권 노론(老論)은 사헌부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을 시켜 자신들이 임금으로 삼으려는 왕세제(王世弟) 연잉군(영조)에게 '대리청정시킬 것'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태종 때 같으면 대리청정 말을 꺼낸 것 자체로 삼족(三族)이 족멸(族滅)되었을 중죄지만 노론에 눌린 경종은 승낙과 취소를 반복했을 뿐이었다.

'경종실록' 1년(1721) 10월조는 행사직(行司直) 박태항(朴泰恒) 등 28명이 상소를 올려 노론 대신들에 대해, "그 마음의 소재는 길가는 사람도 안다(其心所在, 路人所知)"고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경종에 대한 역심이라는 뜻이다.




'정조실록' 즉위년(1776) 8월조에 따르면 영남 유생 이응원(李應元)은 영조 38년(1762) 사대부도 아닌 나경언(羅景彦)이 사도세자를 고변하는 상변서(上變書)를 올리자 이를 비판했다. 그 글을 불태우지 않고 다급하게 영조에게 올린 것에 대해 "그 마음의 소재는 길 가는 사람도 역시 안다(路人亦知)"라고 비난했다. 세자를 죽이려는 노론의 음모라는 뜻이다. 최근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티베트 독립 요구 시위를 '사마소의 마음은 길 가는 사람도 안다'고 비난했다. 티베트인들의 독립열망을 '사마소의 마음'으로 비유했다면 말은 맞지만 이 용어는 주로 부당한 속셈을 비난할 때 쓴다는 점에서 잘못된 인용이다. 독립국가 티베트를 식민지로 삼은 중국의 속셈이야말로 전 세계의 '길 가는 사람'도 모두 아는 바이다. 같은 '삼국지' 위서에 나오는 '이백위흑(以白爲黑), 즉 '흰 것을 검다고 한다'는 말이 적격이다.



16세 휘 朴泰恒 1647/인조22~1737    晦窩公 東說-濠-世楷-泰恒-弼幹
자는 사심(士心). 세해(世楷)의 아들이다.
1687년(숙종 13) 통덕랑(通德郎)으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693년 사서(司書)가 되고, 필선(弼善)․보덕(輔德)․문학 등을 거쳐
1701년 헌납으로 있을 때에는 궁가(宮家)절수(折受)의 폐단과양남(兩南)의 급재(給災)에 관한 소를 올려 대책을 세우게 하였다
1703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가 대마도(對馬島)와 교역하는데 조정에 품의(품議)하지 않고 전결(專決)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된 바도 있다.
이듬해1704 다시 승지로 기용, 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1706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
1707 승지․대사간․강원도관찰사․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 예조참판으로 승진, 소론의 입장에서 (世弟:뒤의 영조)책봉을 주장하는 노론을 적극 탄핵하였고, 이듬해 1721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우참찬․공조판서․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삭탈관직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좌참찬․
1728 좌찬성․예조판서․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 4권이 후세에 남겨짐

※합천알묘록; 계유(1693 숙종19년)3월 이 본도도사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숙종19 8/14 박태항(朴泰恒)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숙종19 11/9 박태항(朴泰恒)을 필선(弼善)으로
    20 4/03 특명으로 박태항(朴泰恒)을 보덕(輔德)으로,
             박태항은 상을 당하였으므로 갈렸다.
    22 4/19 박태항(朴泰恒)을 문학(文學)으로,
     10/2 부제학(副提學) 조상우(趙相愚) 등이 홍문관(弘文館) 신록(新錄)을 만들었는데
             박태항(朴泰恒)․조태동(趙泰東)을 뽑았다.
    26 10/19 박태항(朴泰恒)을 헌납으로,
    29 3/05 동래부(東萊府)에 보고하니, 부사(府使) 박태항(朴泰恒)이
    30 10/13 박태항(朴泰恒)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31, 7/29 .박태항(朴泰恒)을 충청 관찰사로,
             박필명(朴弼明)을 헌납으로,
    32 10/30 동지 상사(冬至上使) 유득일(兪得一)․부사(副使) 박태항(朴泰恒)․가 떠났다.
    33 4/24 박태항(朴泰恒)을 승지로
     8/05 박태항(朴泰恒)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34 2/25 박태항(朴泰恒)을 대사간(大司諫)으로,
     5/06 박태항(朴泰恒)을 승지(承旨)로
    37 4/13 박태항(朴泰恒)을 대사간(大司諫)으로,
    38 10/26 박태항(朴泰恒)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숙보42 4/01 형조 참의(刑曹參議) 박태항(朴泰恒)을
경종0 7/18 박태항(朴泰恒)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1 12/14 박태항(朴泰恒)․이징귀(李徵龜)를 동의금(同義禁)으로,
     12/19 박태항(朴泰恒)을 예조 참판으로
     2 1/28 박태항(朴泰恒)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3/12 박태항(朴泰恒)을 형조 판서(刑曹判書)
     11/17 박태항(朴泰恒)을 우참찬(右參贊)으로
     3 12/29 박태항(朴泰恒)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4 3/08 박태항(朴泰恒)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영조 3 7/07 박태항(朴泰恒)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7/19 박태항(朴泰恒)을 좌참찬(左參贊)으로
     4 10/28 박태항(朴泰恒)을 좌참찬(左參贊)으로
    10 02/02 ,사직(司直) 박태항(朴泰恒)이 상소(上疏)하여 민호(民戶)의
             대동법(大同法)을 행하여 양역(良役)의 폐단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다.

3.금정산성 사적 제215호
지 정 일 1971.02.09
소 재 지 부산 금정구 금성동 일원
시 대 삼국시대
조선시대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 29년(1703)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쌓은 곳이다. 전체길이는 17,337m이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박태항에게 책임지어 쌓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에 앞서 현종 8년(1667)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중요한 곳에 있어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한 성임을 알 수 있으며, 성의 크기나 성벽을 쌓은 양식으로 볼 때 처음 성을 쌓은 시기는 보다 앞선 시기까지도 올려 볼 수 있다.
숙종 33년(1707)에는 성이 너무 넓다 해서 성의 중간에 남북을 구분하는 성을 쌓았고 영조 50년(1774)에는 성이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일단 폐지하였다. 순조 6년(1806)에 성을 다시 고쳤으며, 성벽은 화강암을 자연석 그대로 이용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동문·서문·남문을 복원하였으며, 1989년에 북문을 복원하였다. 현재 4㎞의 성벽이 남아 있으나, 조선 후기에 도성과 주변의 대규모 방어시설을 충실히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금정산성     사적 제215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03년(숙종29)에 국방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해상을 방어할 목적으로 금정산을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성벽의 길이는 약 17km, 높이는 1.5~3m 이고, 면적은 약 8.2km에 이르는 국
내 산성 가운데 가장 거대한 산성이다.

이 산성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1703년(숙종 29)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동래부사 박태항(朴泰恒)을 시켜 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의 규모나 성벽 축조양식으로 볼 때 신라시대에 왜적을 막기 위하여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1707년(숙종 33)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중성을 쌓고 장대·군기고 등의 시설을 보충하였으며 1808년(순조 8) 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문을 신축하고 수비군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부터 2년에 걸쳐 동·서·남 3문과 성곽 및 4개의 망루를 복원하였으며,1989년 북문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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