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 기행 서계 박세당 ( 西溪 朴世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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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5 14:42 조회2,284회 댓글0건본문

서계공 장원급제 교지.jpg

서계종손 박용우.jpg
아래글은 지난 2006년 7월 6일자 주간 한국에 올린 기사를 복사해온것입니다.
글을쓴 서수용씨는 40대의 젊은이로서 한학과 보학에 통달하신 분으로 보학계의 태두(泰斗)로
지난주에 주간 한국에 올라온 소고공의 기사(記事)도 내용을 종중에 직접 보내주고 우리반남박씨 보학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분으로 현재도 우리의 선조분중 여러분에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종가 기행[종가기행 ⑪] 西溪 朴世堂
조선 후기 대학자… 후생 가르치다 이단으로 몰리기도
반남 박씨 서계 박세당 1629 (인조7) - 1703 (숙종29) 자 季肯, 호 西溪, 시호 文정
박세당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고려 시대 학자인 박상충(朴尙衷, 1332-1375)의 10대손이며, 좌참찬 박동선의 손자요 이조참판 박정(朴炡)의 네째아들이다. 의령 남씨 남일성(南一星)의 딸을 배필로 맞아 태유(泰維)와 태보(泰輔), 태한(泰翰)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1629년(인조7년) 8월 10일 전라남도 남원부 관아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부친상을 당했다. 소년 시절 고모부인 교관 남사무에게 글을 배운 뒤 처남인 남구만, 처숙부인 남이성(南二星) 등과 경서를 강론했다. 32세에 증광문과를 장원 급제했다. 그의 둘째아들 역시 문과에 장원 급제했으니 이처럼 부자가 겹경사를 한 것은 조선 시대에 드물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1세에 모친상, 22세에 셋째 형 사망, 38세에 부인 사망, 55세에 중형(仲兄)사망, 58세에 장자 사망, 61세에 둘째아들의 사망이 이어졌다.
서계 박세당의 글을 읽다보면 그는 시대를 초월해 정신적으로 폭넓게 사유했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40의 불혹(不惑) 나이에 말 그대로 세상의 부러움을 떨쳐버리고 자아 성찰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수락산 석천동은 부친인 금주군(錦洲君)의 유업이 있던 곳이며 먼저 간 아내 의령 남씨가 잠든 곳이다. 채소밭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밤이면 삼간초옥에서 성현의 경전을 고증하며 심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 태도로 완성한 '사변록' 책은 왕명으로 조목조목 비판 받아 끝내 사문난적이라는 극단적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실록에 나타난 서계에 대한 인물평은 극단적이다. 숙종26년 8월엔 이조판서직이 내려졌다.
박세당은 벼슬이 낮은 때부터 성밖 교외에 살면서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후생들을 가르치면서 사서를 주석하였다. 그는 주자와 다르게 해석한 것이 많았으니 이를 두고 이단(異端)이라고 말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서계는 한갓 문사(文士)이지 이단자는 아니다.
삭탈관직되어 유배형에 처해진 그가 이인엽(李寅燁)이 상소하여 풀려나 석천동 정침에서 임종한 것은 그나마 천행이다. 숙종 실록에 박세당과 관련된 글이 115건, 사변록 글이 18건에 달하며, 숙종29년에만 10여 건이 실려 있다.
비난의 포문은 홍계적(洪啓迪:1680-1722)이 유생 108명과 함께 열었다. 이들은 박세당의 글이 성인을 업신여겼으며 정인(正人)을 욕했다고 단정한 뒤, 이경석 비문과 사변록을 거두어 불태움과 동시에 엄중한 벌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대해 국왕의 조치는 신속했다. 즉시 삭탈관직과 함께 문 밖에 내치게 했고 유신(儒臣)들에게 조목조목 따져 잘못을 지적한 글을 올리게 했다.
김창흡 등이 가장 먼저 팔을 걷고 서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박세당의 제자인 수찬 이탄(李坦)과 이인엽(李仁燁) 등이 구명소를 올려 반박했다. 이탄은 후일 서계의 연보를 작성한 사람이며 이인엽은 상소로 서계가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한 이다.
서계는 1703년 (숙종 29년) 75세로 5월 21일 세상을 떠나 수락산 서편의 장자골에 잠들었다. 아들 박태보의 주선으로 그린 영정을 통해 62세 때의 생전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사변록(思辨錄)에 얽힌 이야기
사서·시경·서경 새로 해석… '사문난적' 낙인
사변록은 박세당의 주요 저술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은 사서와 시경과 서경의 본문을 주석한 것으로 모두 14책 분량이다. 특히 그가 역점을 둔 것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즉 사서인데 그중에도 대학과 중용을 중시했다.
그는 기존의 금과옥조로 받들던 주자의 견해라 할지라도 다시 천착해 자신이 이해한 내용으로 새로 주석을 달았는데 경전의 이러한 해석은 조정과 학계에 큰 문제를 야기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극단의 공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사문난적이란 성현의 학문과 상반된 해괴한 논리를 펼쳐 정도를 해치는 도적(盜賊)이라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사문난적이라는 극단적 공격을 받았던 인물로 윤휴와 박세당 그리고 허균을 들 수 있다.
윤휴는 서계보다 12년 선배로 서로 학문적인 교감이 있었다. 국왕으로부터 조목조목 사변록의 잘못을 지적해 올리라는 명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 일을 맏은 이는 응교 권상유(權尙游: 1656-1724)와 교리 이관명(李觀命: 1661-1733)이었다. 이들은 공동 작업 형식으로 진행했다.
권상유는 우암의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의 아우로 이조판서까지 이르렀던 학자요 정치가다. 권상유는 왕명에 따라 부담은 가지면서도 변파록(辨破錄)을 지어 올렸는데 이를 본 농암 김창협은 "나는 그의 학식은 따를 수 없다"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이관명은 양관 대제학과 우의정에 까지 이른 학자요 정치가였다. 그의 아우인 이건명(李健命) 역시 우의정을 지낸 혁혁한 전주 이씨 밀성군파(密城君派) 출신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44세로 이조좌랑 직에 있었다.
결국 변파록은 두 신하의 사퇴로 우여곡절을 겪은 뒤 1703년(숙종29) 8월에 결국 이관명이 완성해 올렸고 이를 홍문관에 보관했다.
수찬 남취명은 사변록을 불태워 없애라는 왕명에 대해 중국에서도 유가에 반대한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그리고 불가(佛家)의 글을 그렇게 하지 않은 사실을 들어 조정을 설득했다.
후손들에게 남긴 처세의 글
타고난 "명운을 잘 지켜라"
누구나 자신이 죽은 뒤 후손들이 반듯하게 잘 살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자신이 살아있을 때 당쟁의 격류에 휘말린 두 아들이 비명에 세상을 떠났다면 남은 자손들에 대한 감정이 보다 더 애틋할 것이다.
서계는 남은 아들과 두 손자 등 자손들에게 경계함(戒子孫文)이라는 글을 남겼다. 1696년(68세)에 쓴 이 글은 '자신의 몸을 온전히 보존해 타고난 명운을 잘 지키는 법(保身全命之道)'으로 요약된다.
모두 네 편으로 나누어진 이 글에서는 줄곧 '조심(愼)'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삼년 상식(上食)은 예가 아니다. 옛날에는 없던 것이다"라고 하면서 내 자손들은 남이 괴이하게 여길지라도 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인 가르침보다 강한 어투다.
매사에 조심해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되 그것이 진리와 어긋난다면 무리가 따르더라도 맞서서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 외에 독서의 중요성과 그 방법, 형제 간의 우애 등을 가르쳤다. 서계공파 종중에서는 이 글을 별본으로 인쇄 배포해 후손들이 읽고 실천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저술
문집 22권 11책 목판본으로 간행
문집 22권 11책이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사변록 외에 농서(農書)인 색경(穡經) 2권 2책 등이 있다. 문집에는 시가 약 800여 수, 상소와 차자(箚子)가 56편, 편지 60여 편, 변론 4편, 서문 13편, 기문 4편, 제발(題跋) 14편 등이 실려 있다. 묘지와 묘갈 등 묘도(墓道) 문자(文字)도 70여 편 실려 있다 입력시간 : 2006/07/05 16:11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종가기행 ⑪] 반남박씨 潘南 朴氏
서계문화재단 설립으로 종중땅 보전 기틀 마련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⑪
- 12대 차종존 박용우 씨, 문중 간 연대 통해 종가 어려움 해결책 찾기 부심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선생의 종가 위치를 일전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의정부를 지나 포천 방면을 지나다닐 때 서계 선생 종택을 알리는 표지판을 본 적이 있었다. ‘경기도 인정 반남 박씨 서계공파 종가’라는 표지판도 함께 붙어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서도 이제는 종가를 인정하고 대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당시엔 왠지 생소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그곳을 다시 찾으니 ‘서계문화재단’이라는 아담한 현판을 단 작은 집과 그 주변의 공원 같은 아늑한 풍광이 먼저 눈길을 끈다.
행정명으로는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197번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7호선 장암역과 인접한 곳이다. 북으로 노원, 마들, 수락, 도봉산역을 지나 7호선 종착역이 바로 장암이다.
종택을 불쑥 찾아가니 박용우(朴龍雨, 1952년 생) 씨와 선산 김씨 내외가 반갑게 맞아준다. 박용우 씨는 서계 선생의 차종손이다. 그는 종택 사랑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로 안내해 부친인 박찬호(朴贊鎬, 1922년 생) 씨에게 필자를 소개했다.
부친이 11대이니 박용우 씨는 12대가 된다. 종택이 있는 이곳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탄탄대로의 벼슬길이 보장되었던 서계가 1668년(현종9) 40세에 벼슬을 버리고 당시 경기도 양주 수락산 석천동(石泉洞)에 있는 선대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내려준 땅)로 귀향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지역이다. 그는 이곳에서 칩거하며 여생을 학문 연마와 후진 양성에만 힘썼다.
종택은 터전에 비해 본래 모습 그대로 정돈되어 있지는 않다.
오지였던 이곳 또한 한국전쟁의 생채기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폭격으로 집 대부분이 소실된 아픈 역사가 서려 있다. 그나마 종가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해둔 영정을 비롯한 수많은 책자와 고문서는 온전했으니 조상의 음덕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종손은 서울의 명륜학원(明倫學院)을 나와 서울시청과 한국전력 등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리고 종손의 부친인 박창서(朴昌緖) 씨는 한학에 조애가 깊었지만 신학(新學)에도 관심이 많아 경성제대를 마친 뒤 공무원과 교편을 잡았다 한다.
차종손은 한국전쟁 피난지인 부산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왕십리, 돈암동, 미아리 등지로 이사를 다녀 초등학교를 네 군데나 옮겨 다닐 정도로 부평초 같은 어린 시절이었다. 그 뒤 성동중, 성동고(20회)를 나와 광운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그는 대기업에서 근무했다.
종택의 풍광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감탄하자 차종손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엄청나게 오지였어요. 비만 오면 중랑천이 넘쳐서 외부와는 완전히 고립된, 섬과 같은 마을이었죠. 전기도 아주 늦게 들어와 오랫동안 호롱불 아래서 생활했고, 교통이 불편해 학교를 다닐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라며 아름다움 경치 뒤에 숨어있는 팍팍했던 어릴 적 삶을 털어놓는다. 그러다가 이어 요즘의 형편을 말한다.
“1960, 70년대까지는 아무도 이곳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80년대 들어서면서 동부간선도로가 개통되어 땅값이 올라가자 종중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문중 일로 오랜 송사까지 겪게 되었지요.”
개발바람에 시골 전답의 땅값이 뛰자 때아닌 효자가 넘친다는 세태인데, 하물며 문중 땅이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으니 오죽 시끌했을까.
문중 일로 종손측과 종중측으로 갈려 송사를 벌이는 일은 일제 시대부터 일어났던 일반적인 현상이며 현재도 비일비재하다. 문중 송사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상처만 남기 마련이다. 시작했다 하면 대법원까지 가게 되는데, 그것은 시간 낭비며 그에 소요되는 인적, 물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외적으로도 집안 망신이다.
다행스럽게도 서계 문중은 고심 끝에 영구 보존을 위해 '재단 설립'으로 절충점을 찾았다. 그래서 2004년 1월 20일 서계문화재단(문화관광부서 설립인가)이 탄생했다. 설립자는 현 종손인 박찬호 씨며 이사장은 차종손 박용우 씨다. 이사가 5명, 감사가 2명, 종중 고문과 자문위원, 운영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가에서는 또한 2001년 고문서와 고서 등 무려 558점의 자료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한 바 있는데, 서계 선생의 시권(時卷: 과거 때 글을 지어내던 종이)과 영정 등이 포함되어 타 문중들이 자료를 안전한 외부기관에 기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 차종손은 종손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을 익히기 위해 여념이 없다. 그는 문중 간의 연대를 통해 종가마다 가지고 있는 고민을 공유하고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고택문화선양회 등의 활동도 기꺼이 나서고 있다. 특히 영남 종가를 이해하기 위해 안동 등을 수차 방문하기도 했다.
차종부 선산 김씨는 종가를 지키기 위해 두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종가를 지키자면 법이나 행정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맏이 천교(天敎, 1981년 생)에게 행정학을 전공하게 했다. 그리고 둘째 천익(天翼, 1983년 생)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게 했는데, 착한 며느리를 맞아 이곳에서 함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종택 뒷산으로 난 길을 따라 서계의 묘소를 찾아 갔다. 산세가 수려해 정말 시에서 읽었던 귀절인 ‘그림속으로 들어가는(擧鞭先入畵圖中)’ 느낌마저 든다.
묘소의 묘갈명은 이덕수(李德壽)가 지었다. 묘지(墓誌)는 스스로 지은 것을 썼다. 묘소 가는 길에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 유배가던 중 경기도 과천에서 39세를 일기로 객사한 서계의 둘째아들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의 묘도 만날 수 있다.
주변에 석천동이라는 암각서(巖刻書)와 풍광이 아름다워 서계 자신이 가장 즐겨 찾았다는 취승대(聚勝臺)라는 글씨가 함께 남아 있다. 넓은 바위에 서계유거(西溪幽居), 수락동천(水落洞天)이라는 암각서도 보인다. 수락동천은 그가 처남인 약천 남구만과 담소를 나누었다는 곳이기도 하다. 사후 반석 옆에 청풍정(淸風亭)이 건립되었으나 지금은 옛 터만 전해오고 있다.
반남선생포증기사비(潘南先生褒贈紀事碑) - 박상충의 포증 기념해 세운 비
서계 박세당의 10대조인 고려시대의 문신이요 학자인 반남(潘南) 박상충의 포증(褒贈)을 기념해 세운 비이다.
반남 박씨에 있어 박상충은 중흥조라 할 정도로 뚜렷한 행적을 남겼다. 특히 그는 포은 정몽주와 함께 주자학 보급에 큰 역할을 한 학자일 뿐만 아니라 향리에서 서울인 송도로 진출해 반남 박씨의 문한(文翰)을 연 인물로도 평가받고 있다. 또한 한산 이씨 목은 이색 집안과 혼인 및 수학을 통해 명문가로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서계와 치열하게 대립했던 우암 송시열에 의해 포증이 추진되어 국왕의 윤허로 영의정에 추증됨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비는 1682년(서계 53세)에 세워졌다. 모두 891자로 된 비문은 역시 10대손인 현석 박세채가 지었으며 글씨는 당대 명필로 유명한 박세당의 맏아들 박태유가 썼다. 이 비문 글씨는 그의 남은 작품 중 걸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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