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선조에 대한 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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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30 09:27 조회2,107회 댓글0건본문
밀양박씨(密陽朴氏)
[요약정보]
본관명 밀양(密陽)
성씨명 박씨(朴氏)
본관소재지 경상남도(慶尙南道) 밀양(密陽)
본관이칭 밀성박씨(密城朴氏)
시조명 박언침(朴彦忱)
[상세내용]
본관 연혁
밀양(密陽)은 지금의 밀양시 일원에 있던 지명으로 삼한시대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했으며 미리미동국(彌離彌東國)이 있었다고 한다. 법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 밀벌 또는 미리벌)이 설치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개편하였다. 995년(고려 성종 16)에는 밀주(密州)로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개편되었다. 1275년(충렬왕 1)에는 군민의 모반 사건으로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어 계림부(鷄林府: 慶州)에 편입되었다가 후에 현으로 승격하였다. 1285년에는 군으로 승격되었으나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밀양부로 승격하였다. 조선 1415년(태종 15)에 밀양도호부가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경상남도 밀양군이 되었다. 1918년에는 부내면이 밀양면으로 개칭되고 1931년에 밀양읍으로, 1989년 시로 승격하여 독립하였다. 1995년 밀양군이 밀양시에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밀양박씨(密陽朴氏) 시조 박언침(朴彦忱)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의 맏아들로서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이를 연유로 해서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8세손 박언부(朴彦孚)를 파조(派祖)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 8세손 박언상),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8세손 박언인),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8세손 박양언), 판도공파(版圖公派: 8세손 박천익), 좌윤공파(左尹公派: 8세손 박을재), 진사공파(進士公派: 10세손 박원), 밀성군파(密城郡派: 13세손 박척), 동정공파(同正公派: 13세손 박원광), 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 15세손 박중미), 정국공파(靖國公派: 15세손 박위), 규정공파(糾正公派: 16세손 박현) 등 크게 12파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分派)되었다. 또 《박씨선원세보(朴氏璿原世譜)》에 의하면 10여개의 본관으로 분적(分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분적종 및 분파
10세손 박환(朴桓)을 시조로 영암박씨(靈巖朴氏), 12세손 박원의(朴元義)를 시조로 하여 태안박씨(泰安朴氏)로 분적되었고, 이 외에도 진원박씨(珍原朴氏), 운성박씨(雲城朴氏), 구산박씨(龜山朴氏), 나주박씨(羅州朴氏), 창원박씨(昌原朴氏), 문의박씨(文義朴氏), 여주박씨(驪州朴氏) 등이 분적되었다.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판도공파(版圖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밀성군파(密城郡派), 동정공파(同正公派), 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 정국공파(靖國公派), 규정공파(糾正公派)
주요 세거지
충청남도 예산군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동
경상남도 밀양시
경상남도 의령군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밀양박씨는 946,307가구 총 3,031,47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참고문헌]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尹昌鉉, 보명사, 1929)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權相老, 동국문화사, 1961)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
디지털한국학(http://koreandb.kdaq.empas.com/)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인물들]
경화(敬和){1} 대륜(大輪) 박강생(朴剛生) 박거겸(朴居謙) 박건(朴楗){1}
박경락(朴京洛) 박경전(朴慶傳) 박경지(朴敬祉) 박계주(朴啓周) 박계현(朴啓賢)
박관수(朴寬洙) 박광영(朴光榮) 박권(朴權){2} 박규순(朴奎淳) 박근원(朴謹元)
박기준(朴基駿) 박기출(朴己出) 박기풍(朴基豊) 박기호(朴基鎬) 박길응(朴吉應)
박내오(朴來吾) 박내원(朴來源) 박노식(朴魯植) 박대덕(朴大德) 박도경(朴道京)
박도상(朴道翔) 박돈(朴潡) 박동규(朴東奎) 박동식(朴東植) 박로(朴𥶇)
박마리아(朴瑪利亞) 박만정(朴萬鼎) 박문건(朴文健) 박문수(朴文秀){1} 박문일(朴文一)
박미(朴楣){1} 박봉령(朴鳳齡) 박상진(朴尙鎭) 박서(朴遾){2} 박서(朴瑞){3}
박선(朴璿){4} 박성(朴惺) 박성석(朴星錫) 박성원(朴聖源){1} 박세중(朴世重)
박세증(朴世拯) 박세화(朴世和) 박소영(朴紹榮) 박수일(朴遂一) 박수춘(朴壽春)
박수홍(朴守弘) 박순천(朴順天) 박술음(朴術音) 박숭원(朴崇元) 박승건(朴承健)
박승종(朴承宗) 박승휘(朴承煇) 박승휴(朴承休) 박시창(朴始昌) 박신규(朴信圭)
박심문(朴審問) 박안기(朴安期) 박안제(朴安悌) 박안행(朴安行) 박안현(朴顔賢)
박연백(朴淵伯) 박열(朴說) 박영(朴英) 박영신(朴榮臣) 박용기(朴鏞蘷)
박용녀(朴龍女) 박용대(朴容大) 박용래(朴龍來) 박용화(朴鏞和) 박위(朴葳)
박유성(朴維城) 박융(朴融) 박은식(朴殷植) 박응수(朴應秀) 박의(朴義){1}
박의영(朴義榮) 박의중(朴宜中) 박이서(朴彝敍) 박이환(朴駬桓) 박익(朴翊)
박인로(朴仁老) 박인복(朴麟福) 박인섭(朴寅燮) 박인호(朴寅浩) 박인환(朴寅煥)
박임항(朴林恒) 박자응(朴自凝) 박자흥(朴自興) 박장설(朴長卨) 박재규(朴在奎)
박정(朴涏){2} 박정길(朴鼎吉) 박정현(朴鼎賢) 박제가(朴齊家) 박종남(朴宗男)
박중빈(朴重彬) 박중손(朴仲孫) 박증영(朴增榮) 박증휘(朴增輝) 박지(朴贄)
박지병(朴之屛) 박지서(朴旨瑞) 박진(朴晉){1} 박진규(朴鎭圭) 박진영(朴震英)
박진원(朴震元) 박창원(朴昌元) 박창화(朴昌和) 박춘성(朴春成) 박충원(朴忠元)
박치화(朴致和){1} 박필정(朴弼正) 박하담(朴河淡) 박한주(朴漢柱) 박해정(朴海楨)
박헌봉(朴憲鳳) 박형래(朴馨來) 박호(朴箎){1} 박호문(朴好問) 박호원(朴好元)
박홍신(朴弘信) 박화성(朴花城) 박효남(朴孝男) 박효정(朴孝正) 박흥남(朴興男)
박흥생(朴興生) 박희광(朴喜光) 박희범(朴喜範) 박희현(朴希賢) 상월(上月)
세찰(世察) 영규(靈圭) 우평(宇平) 태선(太先) 박신생(朴信生)
박신원(朴新源) 박운(朴雲) 박윤묵(朴允墨) 박인(朴忍) 박정로(朴廷老)
박춘무(朴春茂)
박씨에 시조는 박혁거세 반남박씨 시조는 휘응주라고 대종중에서 결론이 났다고 듣고있는데 아직까지 시조 선조 시비가 끝난것 같지 않기에 몇자 올립니다.
다시 재론(再論)하자면은 최초 득(得)관 한자가 시조라고 사료됨 타의건 자의건 반남박문에 최초 득관한 선조는 휘응주이니 시조로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있습니다. 저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금도 득관하는 고아나 외국사람들이 있습니다.고아는 부모가 가난과 피치 못할 사정으로 버린경우라도 양육한 부모가 자기호적에 입양한 경우와 타인이 단독으로 호적신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동래에서 주었으면은 동래하씨 청주에서 주었으면은 청주주씨 이런식으로 호적에 본관을 기록합니다. 우리나라에는 호적법에 본관을 기록해야 하기때문입니다.
본관은 타인이 신고하고 장성해서 아들딸 두고 손자까지 여러명 두었고 증손자 고손자까지 세월이 흘렀다면은 친부모가 나타났다 해도 동래하씨 청주주씨는 고칠수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휘응주는 그윗대를 알수도없지만은 그부(父)나 조(祖)가 나타났다고 해도 박혁거세같이 박씨에 선조일뿐 반남박씨에 시조는 될수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밀양박씨들도 그윗대를 다알수 있지만은 득관한 선조 휘 언침을 시조로 하고있습니다. 한국중앙연구원 구(정신 문화원)에 수록한 밀양박씨 상세 정보를 올리니 참조하시고 다른 성씨들도 모두가 어찌되었던 득관한자가 시조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아보시길 바라면서 차후로 시조선조시비는 이것으로 끝났으면 하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지금 까지 안타까운 것은 밀양박씨 들이 선원보(璿原譜는 왕실에 족보임)만든 다는 정보를 듣고 밀양박씨 종친회 에 전화로 문의 하니 낙원동 에서 별도로 선원보을 편집 한다기에 낙원동 사무실을 찾;아 가 보니 저에 직계 선조 휘박록 육우당 휘 회무 두분이외 몇분을 인물난에 뽑아 놓은것을 보고 항의 했으나 오래전에 기록에 의해서 책을 만든 다기에 알아보니 시조 휘 응주을 지길 하단 에 기록 조작한사실 을 발견 책을 만드는 주모자을 만나기 위해 몇번을 시도 했으나 만나 주지않니하여 할수 없이 영주 그 당시 판관공 도유사 춘서씨게 알려 더 상세히 조사 헤서 대종중 회의로 상경 하니 그때 의논 하기로 약속 하고 계속 조사 해보니 일제때 밀양박씨 박 0 0씨가 조작 한사실은 알았으나 세월은 흘러 조작한 자는 죽고 없고 살아있는 자들은 책을 빙자헤서 책을 만들어 이익을 챙기려는 것을 알았으나 혼자서 고민하다가
세로운 자료도 수집하고 묘책을 고민하든중 저의 생각 으로는 신문에 선원보 는 사실 않니라고 보도 하고 우리 반남 박씨 전체 종인들은 책을 구입 하지 말것을 신문에 보도 하고 싶었으나 종중 간부도 안니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속수 무책 으로 고민 하다가 판관공파 도유사 춘서씨와 대종중 회의로 상경 하는날 청량리역앞 다방에서 만나기로 전화로 약속 하고 청량리 역앞 다방에 안동 중파 종서씨 와 동행 춘서씨를 만나 대종중 에가서 신문 광고을 권하고 세로운 정보도 제공 할겸 다방 에서 기달려으나 약속한 시간에 나타 나지안니하여 알아본 결과 귀가미어 잘듣지 못헤서 약속 장소에 오지않니하고 대종중으로 바로감 다른일도 있어으나 몇시간 을 기달리 다가 제가 조사한 세로운 자료와 모든겄이 중요하기 때문 대종중 으로 찾;아가니 마침 상임유사 의장 선거한다고 거수로 의장을 뽑고 필요없는 사람은 나가라고 누군가 말하고 또 누구는 이런 추태를 다른 사람 에게 보여 챙피 하다고 말하니 참으로 한심한추태을 구경하고 내쪼기다 싶이 종중을 나와 종중 간부들이 잘해결 하겟지 생각 했느데 나중에 알고보니 선원보는 전국에 팔아먹고 우리 문중에 가까운 사람도 구입했으니 책을 돌리기전에 제생각대로 햇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은 지금까지 갗고 있으나 그때 챙피당한 생각은 지금도잊지않니하고있음 아직 도 그때 그사람들이 간부로 있으니까 기억 하실
분도 계실 이라고 생각함니다
선원보 책이 세상에 나오고 우리종중 에서 항의하고 바로 잡았으나 책이란 수백년 뒤에도 없어지지 않니하고 조작한 자는 죽고 없고 책만든자도 세상에 없을떼 우리 후손 들이 또 엉터리 시비에 신경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인천우거에서 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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