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 13세 남곽공南郭公 동열東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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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중 작성일16-03-31 14:25 조회1,280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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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남곽공南郭公 동열東說] 1564(명종19)∼1622(광해군14) 자는 열지(悅之), 호는 남곽(南郭)· 봉촌(鳳村). 할아버지는 사간 소(紹)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응복(應福)이며, 어머니는 증 좌승지 임구령(林九齡)의 딸이다. 다섯 살에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고,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었으며 1594년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이어 정언· 병조좌랑· 사서 등을 지냈다. 1601년 홍문관의 수찬· 교리를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으며, 그 해 가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의주(義州)에 다녀왔다. 1603년 검상(檢詳)· 사인(舍人)을 거쳐 사성(司成)· 상례(相禮)· 통례(通禮)를 역임하였다. 뒤에 황주목사로 나가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고 민폐를 없애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했으며, 어사(御使)의 추천으로 옷감을 하사받았다. 1606년 예조참의· 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우부승지에 올랐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의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충주목사가 되고 이어서 대사성이 되었다. 이듬 해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소를 올리자, 이에 분격한 유생들이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말을 듣고 광해군이 크게 노해 유생들을 투옥시킬 때, 이를 말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진해 나주목사로 나갔다. 나주는 원래 다스리기 어려운 고장이었으나, 그는 유풍(儒風)으로 잘 다스렸다.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다 동량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마침 중풍으로 석방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했고, 경사(經史)와 백가(百家) 및 국조의 고사에 두루 통하였다. 만년에 송추(松楸)에 폐거(廢居)할 때 이항복(李恒福)과 자주 내왕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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