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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영의정 호소제 휘노수신 부묘갈명 소고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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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7:27 조회1,8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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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증(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兼) 영경연관상감사(領經筵觀象監事) 행(行)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 봉정대부(奉正大夫) 노공(盧公) 비명(碑銘) 병서(幷序)

소재(蘇齋) 노상공(盧相公)의 전상(前喪)은 융경(隆慶) 무진년(1568,선조1년)에 있었다. 상공은 당시에 호서(湖西)의 안사(按使)로 궐하에서 임명을 받다가 부음을 듣고 달려가, 거주하던 상주(尙州) 화령현(化寧縣)의 조부 묘역에 장사를 잘 치렀다. 그 다음 만력(萬曆) 신사년(1581,선조14년)에 후상(後喪)을 당해서는 상공이 이미 동부(東府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가 좌규(左揆좌의정(左議政))로 승진한 상태였다. 대부인(大夫人)이 그를 따라 서울에 있었으므로, 그 상여를 모시고 목도(木道뱃길)를 통하여 돌아가 부장(附葬)하였다. 여러 의전(儀典)을 상고하여 여생지석(麗牲之石묘비(墓碑))에 새기고 그 뒷면에 음기(陰記)를 기록할 자를 찾았는데, 승임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 명에 응한단 말인가? 삼가 그 행장을 살펴서 차례로 서술한다.
노씨(盧氏)는 왕려(王麗고려)로부터 내려 왔으며, 광산(光山)을 본적으로 하였다. 간간히 벼슬길에 오른 자가 있었는데, 국조(國朝)의 의정공(議政公) 휘(諱) 숭(嵩)에 이르러 비로소 세상에 크게 드러났다. 휘 덕기(德基)라는 분이 있어 장헌왕(莊憲王세종(世宗)의 시호(諡號)) 때에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들었는데, 초액(椒掖왕비)의 사사로운 신분을 스스로 내세우지 않았으니, 그 일이 점필재(佔畢齋) 김공(金公)이 지은 지(誌)에 구비되어 있다. 여기서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휘 희선(熙善)이 났다. 판관의 아들은 참봉 휘 경장(敬長)이었는데, 또한 돈녕(敦寧)의 직임을 맡았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판서의 후사가 된 자는 휘 후(珝)인데, 거치는 자리마다 능력이 있다는 소리가 있었으며, 마지막에는 풍저창 수(豐儲倉守)를 지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찬성은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바로 도정(都正) 휘 현동(賢童)의 따님이었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휘는 홍(鴻)이고 자는 백란(伯鸞)이니, 곧 상공의 선고(先考)이신, 증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공(議政府領議政公)이다.
공이 처음 태어날 적에 찬성공(贊成公)의 꿈에 햇빛이 창에 가득한 이적(異蹟)이 있었으므로, 문득 이름으로 지어 기록하였다. 조금 자라서 학문을 익혀 한 번 공사(貢士)의 선발에 응시하였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하였고, 보천(保薦인재를 천거하면서 보증을 서는 것)한 것이 또한 여러 번이었으나, 모두 되지 않았다. 용사(龍蛇)의 해에 사림의 화가 참혹하였는데, 상공이 천관(天官)의 낭료(郞僚)로 있다가 해도(海島)로 유배를 당하였다. 공은 환난(患難)이 애절하여 출사(出仕)의 뜻을 접고 스스로의 덕을 감추었다. 게다가 섬약한 체질(體質) 때문에 풍습(風濕)에 걸렸는데 계속 이어지면서 낫지를 않았다. 나이 50이 넘어서 찬성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거의 상주 노릇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임술년(1562,명종17년)에 이르러 또 위독한 지경이 되어 마침내 남쪽 고을로 돌아와 노년을 보냈다. 정묘년(1567,선조즉위년)에 사성(嗣聖)께서 등극하시어 나라의 정사를 새롭게 하시니, 옛날에 폐해졌던 이들이 비로소 등용되었다. 상공은 영수(領袖)의 숙망(宿望)으로 조정에서 위의(威儀)를 드러내었으므로, 조정의 의론이 장차 공을 도하(都下)로 불러들여 조석으로 봉양하기 편리하게 하려고 하였다. 대개 상공께서 어버이를 떠나 있은 것이 20년이 넘어서 남은 날이 짧다는 탄식이 정히 급했는데, 물정(物情)은 계자(季子)의 귀환을 기뻐하면서 오직 하루라도 조정에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다음 해 봄에 마침내 공에게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를 제수하였는데, 공의 병이 이미 깊어 직무에 나아갈 수 없었다. 4월에 가마를 보내라는 명을 내리는 등, 성념(聖念)이 더욱 정성스러웠는데, 공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에 부득이 상공이 서원(西原청주(淸州))의 목사(牧使)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아직 조정을 떠나기 전에 또 방면(方面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된 것을 가리킴)으로 올려서 옮기게 하니, 모두 공이 있는 곳과 가깝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공은 미처 만나지 못하고 그 해 겨울 11월 모갑(某甲)에 사곡(沙谷)의 옛집에서 돌아가시니, 춘추가 73세였다.
공은 평소에 분수 밖의 일을 추구함이 없이 술로써 자오(自娛)하였는데, 많이 마셔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힘써 다른 사람에게 공손하고 신의가 있었으며, 엄숙하였다. 애초에 상공이 주(州)의 수령이 되어 조정에 나아가 숙배(肅拜)하고 받겠다는 뜻을 고하였는데, 누누이 청렴하고 신중할 것을 부탁하면서 한마디도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공의 사람됨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찬성을 아버지로 삼고 상공을 자식으로 삼았으니, 숭극(崇極)의 작위에 추증되어 영원히 사후의 지극한 영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공의 배위 성산 이씨(星山李氏)는 전조(前朝)의 부원군(府院君) 장경(長庚)의 후예로서, 감찰 유(洧)의 증손(曾孫)이고, 건공장군(建功將軍) 휘(諱) 주(湊)의 손녀이며, 대사헌(大司憲) 휘 자엽(自華)의 따님이다. 대헌공(大憲公)의 형제 4인 중에 셋이 이품(二品)의 벼슬에 올랐는데, 대헌이 그 막내이다. 청백(淸白)으로 자처하였으며, 기개가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부인은 명문(名門)에서 태어나 유순함이 몸에 베어 찬란하게 규범(閨範)이 있었으며, 공에게 시집와서는 내외(內外)에서 현부(賢婦)를 얻었다고 경하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온유(溫柔)하고 공신(恭愼)하였으며, 시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고 군자(君子)를 섬김에 어김이 없었으며 재물에 임해서는 불의(不義)로 얻은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였고 자식을 가르칠 때는 의방(義方)을 우선으로 하였다. 아손(兒孫)을 대할 적에는 편애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일을 처리하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비록 사대부라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으니, 당중(黨中)의 유식인(有識人)들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친속(親屬)의 비복(婢僕)이 인연(因緣)이 있어 자서(子壻)에게 전속(轉屬)되는 경우가 있으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세상의 변고를 겪으면서 집안의 어려움이 이미 많았는데, 눈앞의 영귀(榮貴)를 또한 기쁨으로 여기지 않았다. 자식들이 일찍이 향곡(鄕曲)으로 돌아갈 뜻이 있는지 여쭈었는데, 이르기를, “나는 너희들을 따를 것인데, 어찌 물어보느냐?” 하였다. 항상 선인(先人)의 제사를 염려하여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으며 더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서남(庶娚)으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에게 사랑을 지극히 하였다. 공보다 13년 뒤에 세상을 떠나니, 연세가 85세였다. 병이 깊어지자 다른 말씀은 없이 다만 두 아들이 상생(傷生)에 이르지나 않을까 탄식하였다. 속광(屬纊임종(臨終))할 즈음에도 오히려 손으로 옷깃을 정돈하였으니, 그 바탕이 아름답고 식견이 높은 것이 이와 같은 바가 있었다. 봉호(封號)는 명부(命婦)의 수위(首位)에 드높았고 복록은 기주(箕疇동국(東國))의 일류(一流)에서 으뜸이었다. 수어(垂魚)가 희채(戱彩)하여, 그 기쁨을 다하였고, 열정(列鼎)에 고기를 올려, 그 봉양을 극진히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살았을 적에는 영화롭게 여겼다.[其生也榮]’는 것이다. 역정(役丁)을 모아서 양사(襄事장례)를 마치고 위적(委積)을 수송하여 전구(奠具)에 충당하는 것에 있어서는, 모두 예권(睿眷)의 특별한 조의(弔意)에서 나와 인자(人子)로서는 검친(儉親부모의 상을 검소하게 치름)의 유감이 없었으니, 비록 후상(後喪)이 전상(前喪)보다 성대하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두 아들은 장남은 곧 상공(相公)이니, 이름은 수신(守愼)이다. 갑오년(1534,중종29년)에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계묘년(1543,중종38년)에 금방(金榜과거(科擧) 급제자 명단을 적은 방목)에 장원을 하였으나, 인묘조(仁廟朝)에는 유과(遺果)를 먹지 않고 양(陽)이 자라서 복(復)이 생겨나기를 기다렸다. 성기(聲氣)가 서로 상응하여 태계(泰階삼태성(三台星)의 별칭으로, 정승의 반열을 말함)로 불러들였으며, 거상(居喪)을 마치기도 전에 윤음(綸音)이 이미 빈자리에 기다리고 있으니, 염매(鹽梅)의 조화가 멀지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남은 극신(克愼)으로, 음사(蔭仕)로 김포 현령(金浦縣令)에 이르렀다. 1녀는 현 가평 군수(加平郡守) 이요빈(李堯賓)이 그 서군(壻君)이다. 손자는 둘로서, 대하(大河)와 대해(大海)인데 모두 현감(縣監)을 지냈다. 대해는 후에 상공의 후사로 들어가 종손(宗孫)이 되었다. 손녀는 셋인데, 학관(學官) 심희수(沈喜壽), 별좌(別坐) 김명현(金命賢), 유학(幼學) 김료(金璙)에게 시집갔다.
외손자는 여섯으로, 지(沚), 한(澣), 준(浚), 숙(淑), 호(浩), 흡(潝)이다. 외손녀는 둘로서, 하나는 유학 이분(李蕡)에게 시집갔다. 증손자는 하나로서, 도형(道亨)인데 딸이 넷이다. 외증손(外曾孫)은 아들 약간과 딸 약간이 있는데, 모두 어리다. 공에게는 측실(側室)의 자식 여섯이 있는데, 원룡(原龍), 종룡(終龍), 복룡(伏龍), 응룡(應龍), 항룡(抗龍), 언룡(彦龍)이라 한다.
오호(嗚呼)라. 가법(家法)의 바름과 자손의 많음은 오늘날에 있어서 공문(公門)에서 짝을 구해보더라도 손가락으로 꼽기가 쉽지 않으니, 어찌 유래가 없이 그런 것이겠는가? 승임이 외람되이 상공의 지고(知顧)를 받았으나 미처 공에 대해서 알지를 못하였는데, 삼가 행장(行狀)에 기술된 것을 보니 말이 극히 근엄하여 한 글자도 과장된 것이 없었다. 형용(形容)한 것이 친절한 부분은 빼면 소루하고 윤색하면 넘쳐서 장차 둘 다 병통이 있게 될 듯하였다. 이에 감히 주제넘게 구문(舊文)을 그대로 따라 쓴 성필(聖筆)의 예를 써서 기록한다. 다만 찬성공의 꿈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생각하였으므로 인하여 그 뜻을 부연해 둔다. 아래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선명한 아침 해가 朝旭之鮮
동방에서 올라왔네 東方自出
내가 꿈에서 보니 我夢見之
찬란함이 방에 가득하였네 爛其盈室
고고한 그 울음소리도 呱呱厥聲
진실로 이 상서에 부합했네 允叶斯禎
이름을 지어 명하니 名以命之
그 성공을 보았네 遹觀厥成
오래되면 징험이 나타나는 법 天久則徵
해가 막 저물었네 歲聿云暮
사람들도 말을 하기를 人亦有言
아이가 필시 크게 되리라 하네 兒子必做
이(離)괘의 밝음이 두 번 일어나니 離明兩作
옛 창이 다시 밝아졌네 舊牖新輝
강후를 세 번 접하니 康侯三接
부응하여 어기지 않았네 符合不違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是子是父
왕이 총애를 하셨네 王用寵嘉
관직을 내려주고 병에는 가마 내려 注官輿病
은총을 곡진히 더하셨네 恩私曲加
북당(北堂)에 심은 훤초(諼草)는 言樹之諼
그 빛이 더욱 빛났네 厥耀彌章
장수하고 존귀하시니 壽考尊榮
무엇인들 상서가 아니리오 夫孰非祥
모인 상서가 날로 화려하여 祥鍾日華
조부가 시작하고 손자가 마무리 했네 祖始孫終
공이 실로 그에 응하여 公實膺之
영광이 유궁에까지 미쳤네 賁徹幽宮
일품의 높은 비석을 一品豐鐫
저 조양(朝陽)에 세웠네 于彼朝陽
오늘날까지 밝은 빛을 드리우니 垂耿來今

노상공 휘수신 부휘노후 조부 휘 노홍 신도비를 세운것은 1581년 노상공 부 노후에
신도비 는 소고선조 께서 찬하심 노상공 께서 당대에 문장가 로 소고를 두고 누구 에
게 부탁 할까    글씨는 명필 한호(한석봉) 신도비 는 현재 상주 화서면 옥연사 경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천 우거 에서 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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