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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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서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7:23 조회1,935회 댓글0건본문
항렬항렬(行列)이란 무엇인가?
항열이란 같은 혈족사이에 세계(世系)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기위한 문중(門中)의 법을 말하며
각기 가문과 파에 따라서 다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이름에 돌림자를 가지고 있고선조들은 자손들의 항렬자를 미리정해놓고 후손들은 이를 따르도록하는데항렬은 각종파 가문마다 다르나 항렬자는 대개 다음과 같은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다.
1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 수(水=洙), 목(木=根), 화(火=환), 토(土=基),금(金=宗)의 변을 순서적으로 사용.
2 십간(十干)순으로 사용 갑(甲=萬), 을(乙=旭), 병(丙=炳), 정(丁=行), 무(戊=茂), 기(己=起), 경(庚=康), 신(辛=新),임(壬=任), 계(癸=揆)를 차례로 사용
3 십이지(十二支)순으로 사용 자(子=學), 축(丑=승), 인(寅=演), 묘(卯=卿), 진(辰=振), 사(巳=龍), 오(午=朱), 미(未=洙),신(申=暢), 유(酉=配), 술(戌=成), 해(亥=鉉) 순서로 사용
4 숫자순서로 사용 일(一:丙.尤), 이(二:宗.重), 삼(三:泰), 사(四:寧) 등으로 사용. 등등 많은 경우가 있는데
우리 반남박씨문중에서는 소종중별로 각기 다른 항렬을 쓰다가
금양위 께서 처음 족보 임오보(1642년)를 발행한 이후에 는15세 는 “世” 자 항렬16세 는 “태” 자 항렬17세 는 “弼” 자 항렬 이후 부터는 “日” 자와 “月”자가 포함된 글자를 교대로 사용하면서 18세 “師” 19세 “源” 20세 “相” 21세 “壽” 22세 “齊” 23세 “陽” 24세 "勝“ 25세 ”緖“ 26세 ”贊“ 자(字)까지 이르렀고
23 세 양(陽) - (예) 박 ○ 양
24 세 승(勝) - (예) 박 승 ○
25 세 서(緖) - (예) 박 ○ 서
26 세 찬(贊) - (예) 박 찬 ○
찬자 다음항렬 27世 부터는 一 二 三 四 가 글씨에 포함된 글자를 현재에는 아래와 같이 사용하고 있다
27 세 우(雨) 하(夏) 준.전(雋)- (예) 박 ○ 우 / 박 ○ 하 / 박 O 준(전)
28 세 천(天) 인(仁) 지(持). - (예) 박 천 ○ / 박 인 ○ / 박 지 O
29 세 춘(春) 승(承) - (예) 박 ○ 춘 / 박 ○ 승
30 세 헌(憲) 령(寧) - (예) 박 헌 ○ / 박 령 ○
31 세 오(吾) 오(五) - (예) 박 ○ 오 / 박 ○ 오
32 세 장(章) 재(宰) - (예) 박 장 ○ / 박 재 ○
33 세 호(虎) 순(純) - (예) 박 ○ 호 / 박 ○ 순
34 세 겸(謙) 선(善) - (예) 박 겸 ○ / 박 선 ○
35 세 욱(旭) 구(九) - (예) 박 ○ 욱 / 박 ○ 구
36 세 평(平) 두(斗) - (예) 박 평 ○ / 박 두 O
본래 선인들이 정해놓은 항렬자는 원칙적으로 중도에 변개(變改)할 수 없으며.
후손들은 그것을 따르도록 관례를 만들어 놓았다,
다만 글자가 조상의 이름에 저촉(抵觸)될 경우에 한해서만 변경이 용인된다.
그러나 당대에 와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바뀌는 수가 있었다.
옛날 전제정치(專制政治) 아래서는 자칫 잘못하면 역적(逆賊)으로 몰리기도 일수였다.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기도 했고 또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조선조에서 역적이 나올때는 항렬을 바꿀경우가 있어 우리문중에서도 한번은 항렬이 바뀌고 두번은 바꾸지 않고 항렬을 사용했다,
첫 번째 영조4년 이인좌의 난 때 우리 반남박씨 문중에 여러분이 가담을 해서 역적으로 몰리고 그여파로 우리종중이 영조에게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위해
영조당시 종중의 어른이신 금평위 박필성. 금원군 박사익 두분이 상소를 올린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있다
영조 4년 4월8일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과 금원군(錦原君) 박사익(朴師益)등이 상소하기를,
“역적(逆賊) 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박사관(朴師寬)은 동종(同宗)에서 나왔지마는, 나라를 배반하여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였으니, 어찌 차마 이 도적과 더불어 그 형제 까지 함께 일컫는 이름을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등의 이름 글자 중에서 '필(弼)'자와 '사(師)'자를다른 글자로 고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였는데,고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행이 금평위와 금원군의 상소로 항렬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으나
두 번째 조선왕조실록에서정조 원년(1776년)/4월1일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씻어줄것과 난신적자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여, 상소를 올렸던 전참판 박상로 전승지 조재환 유학 이일화등을 처벌하 였다. 참판 박상로는 역적으로 몰리고 집안이 파멸되었고( * 순종1년3월25일 억울한 누명을 벗고 관직이 회복 되었다)
이로인해 20世 “相” 字항렬이 “宗“ 字 항렬로 바뀌고 말았다.
20世의 “相“자 항렬로 참판 박상로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난 해를 중심으로 1776년 이전에 출생 하신분들 께서는 모두 상자항렬로 이름을 지었으며
1776년 이전에 돌아가신 분들은 개명을 안하고 상자항렬 그대로 족보에 기재되있으나.
예) 박상조(1718-1753)상면(1730-1757) 상한(1742-1767) 상규(1731-1769) 상철(1737-1761)
1776년 이전에 출생하신분이라도 1776년 이후까지 사신분들은 모두 종(宗)자(字) 항렬로 개명을 하고 상자항렬의 본명은 아명으로 기록되있다 우의정을 지내신 박종악 선조께서는 영조와 정조 양대에 걸쳐 벼슬을 하신분으로
1776년 이전에 대사간 박상악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 있으며,
1776년 사건 이후 정조때에는 박종악으로 개명하신 이름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 있다
<박상악/박종악>
<조선왕조실록>에 기록>
영조47(1771)/09/29 박상악(朴相岳)을 교리로,
영조52(1776)/02/10 대사간 박상악이 여러 군문의 창고를 조사할 것과 회시 합격생들을 면시할 것을 상소하다
정조0 (1776)/04/01 박상로·조재환·이일화·최재흥·유한신·이동양 등을 복주
하다
정조0 (1776) 11/19 박종악(朴宗岳)을 기장현(機張縣)으로 찬배(竄配)시켰다
정조10(1786)10/23 전 참판 박종악(朴宗岳)을 서반으로 보내어 군직(軍職)을 주라고
명하였다
정조16(1792) 1/21 박종악에게 우의정을 제수한 까닭을 밝히다
세 번째市中 또는 문중(門中)에 흘러다니는 이야기로“김옥군,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주축으로 한 개화당의 혁명(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면서 그들은 사대당(事大黨)인 민정권(閔政權)에 의해 역적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김옥균(안동김씨)의 균자 항렬자는 규(圭)로 홍영식(남양홍씨)의 植자 항렬은 杓로 박영효(반남박씨)의 영(泳)자 항렬은 승(勝)으로 서광범(달성서씨)의 光자 항렬은 병(丙)으로 서재필(달성서씨)의 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꾸고 말았다”라고 기록한 책이있고 ( 한국인의성보-삼안문화사 1986발행. 자랑스러운 나의 족보-뿌리찾기 운동본부-) 또 그런 말들이 널리퍼져있는데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집안에서는 항렬자를 바꾸었는지는 모르나 우리 반남박씨 집안에서는 바꾼일이 전혀 없는데도 바꾼것 같이 알려져있고.
우리문중의 모든 종원들도 이를 사실로 믿고
또 우리 반남박씨 역사에 대해서 통달하신 분들까지도 “泳(영)“字에서 항렬에서 ”勝(승)“ 字로 항렬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기에 이를 바로 고치려고 한다
금릉위 박영효는 철종의 범씨 소생 외동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금릉위(錦陵尉)가 되고,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주창하며,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신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전후영사겸좌포장(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삼일천하(三日天下)로 그쳐,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옛날 족보 을유보(1825년출간)의 서문에서
양자(陽字) 하행렬강정도(下行列 講定圖 )에( 23世 “양”자항렬 이후의 항렬표 ) 의하면
박 勝 O 24세
박 O 緖 25세
박 贊 O 26세
박 O 雋 27세
박 持 O 28세
승(勝)자 항렬은 위와같이 1825년 족보 발행시 이미 정해져 있었고,
족보를 검토해보면 을유보 발행하기 그전(前)부터 공식적으로 승자를 24世 항렬로 사용했으며 갑신정변을 일으키기 이전 100 여 년전에부터 승(勝)자 항렬이 나오기 시작하고
그 예로 족보
8권 181쪽 勝春(1784년생)분이계시고 그 외에도
1700년대말에 출생한 분이 있으며 (세적편63쪽 승현(勝顯 1792 증 중추원의관)
1820년대 이전에 출생한 분은로는
승우(1811년출생) 승창(1816년출생) 승문(1817년출생) 승기(1818년출생)계시고<세적편 63페이지참고>영자항렬은 족보를 조사해본 결과 오창공파중에서도 금양위 분서공 미(瀰)의 자손 중에서만 영(泳)자항렬을 쓴 것으로 나오고 오창공파의 금양위파 외에 다른 자손에서는 영자 항렬을 쓴 집안이 없으며
금양위파 종손은 승자항렬을 사용했으며
오창공파 壽 자항렬이 96 분중 17분의 가계에서는 “승”자항렬을 쓰고 있으며
나) 금능위 박영효가 갑신정변을 일으킨때가 1884년이고 이 이후에 역적으로 몰려서 영자항렬을 승자항렬로 바꾸었다는 것인데
갑신정변 으로 항렬을 바꾸었다면 위의 두 번째 항에서 “상“ 자항렬이 ”종“자 항렬로 바뀐것 같이
갑신정변(1884년) 이전에 태여나시고 갑신정변 이후까지 생존하신 분들과 갑신정변이후 태여난분들은 영(泳)자항렬이 없어야 하는데 최근 까지도 영자 항렬을 쓰고 있으며갑신정변으로 금릉위가 역적으로 몰려서 항렬을 영(泳)자에서 승(勝)자로 바꾸었다는데
금릉위 가까운 친척 모두 개명한 사실이 전혀 없음.
위의 가) 와 나) 의 상황으로 볼때 본래부터 “승” 자 항렬은 영자항렬을 쓰기전부터 사용 했으며 역적이라는 죄명으로 영자할렬은 바뀐일이 전혀 없이 현재까지도 사용했음
영자 항렬
1. 영자 항렬은 금양위 자손중에서 많은 분이 사용했으나 반남박씨중 다른 문중에서는 발견이 안된다.
2. 판관공 후손에서 몇분 발견되는데 어찌해서 사용했다는 이유가 분명치 않다.
영진이란 분이 사마시합격당시는 영자 항렬을 썻는데
족보에는 승진으로 기록이 되어있음
3 그러나 금양위 종손은 승자항렬을 사용했다.
세교-태두-필하-사익-대원-상로-宗壽-제상-정양-승문(1824-1843)
4. 영자 항렬은 영학(1824-1885)부터 사용
세교-태두-사설-도원-상면-남수-제현-경양-영학(1824-1885)
5. 금양위 후손중에 참봉공댁으로 양자간분은 승자 항렬을 쓰고
出 勝肇(조)⟶準陽(세성-태식--사윤--종면-홍수-제정 (1-578)
6. 참봉공댁에서 금양위 댁으로 양자온분은 영자항렬과 용자 항렬을 사용
한집안에서 4형제중 3형제가 금양위댁으로 양자를 갔는데
참봉공댁에 남아있는 첫째분만 승자항렬로 남아 있고
양자간분 세분은 항렬을 바꿈
영준 ⟵세성 1-581
영건 ⟵세성 1-581
用厚(1848-1903)원릉참봉 ⟵봉양-제형-붕수-종원-사한-필정-태적-세성 1-581
7. 用雨라는 분은 초명이 泳珏이였다가 용자항렬로 바꿈
泳薰이란분은 사마시, 문과방목에는 영훈으로 기록되고
1887년 이후에는 용원이란 이름으로 계속 벼슬을 지냄
8. 용자항렬을 쓰시는 분중에는 벼슬한분이 많음
9. 금양위 후손중 경신보 기록에 용자 항렬쓰는 분은 8 분
용우; 초명 영각
用悳; 淮陽郡守
용원; 부제학
용후; 원릉참봉
용면 용기 용하 용석
10 위에 예로 보면 영자항렬에서 승자항렬로 바꾼것이 아니라 용자항렬로 바꾼것이 아닌가 의심이간다.
11. 승자항렬은 을유보(1825년 발간) 서문중 陽字下行列 講定圖에 의하면 24세 승자 25세 서자 항렬이 결정되어 있으며,
승자항렬 실제 사용은 족보에 의하면 1800년 이전부터 사용한 기록이 있다
朴勝顯(1792년) 증 중추원의관 8권240
朴勝宇(1818년) 노직 가선 동추 6권382
朴勝昌(1816년) 관 통정 8권373
朴勝文(1817년) 8권847
가 이상의 조사는 경신보에 기록된 자료를 분석한 것으로
나 경신보에서는 어디에도 영자항렬이 승자로 바뀐 흔적이 없다.
(승자항렬로 초명이 영자항렬로 기록된분이 없으며
상자항렬에서 종자 항렬로 바꾸었을때는 종자항렬 사용하신 분들에서게 상자 항렬 초명이 다수기록됨)
다 오히려 영자항렬에서 용자항렬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있다
라 벼슬을 하신분중 금릉위 영효와 같은 영자 항렬을 피하기 위해 용자 항렬을 쓴것이 안닌가 의심이 된다
마 경신보 3권1-136 쪽에 영(승)자 항렬 269분중 승자항렬이 120 분이 된다
바 영자항렬은 최근까지 사용함 영운(1972년생)
사 시중에서나 종중의 종원들이 말하는 영자항렬에서 승자항렬로 바꾸었다는 근거는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종중의 연세 많으신 어른분들 께서도 문서나 기록에 나온 이야기가 아닌 윗 어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그것을 윗분들 말한 이야기이니까 절대불변의 진실로 알고 있기에 이를 고치고저 합니다.위의 일들은 선조님들의 行蹟과 事蹟을 족보.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기타자료에서 추적하던중 발견한 것으로 반남박씨의 항렬. 항렬의 바뀐원인에 대한 기록은 못보고, 제 개인적인 생각데로 쓴것이기에 이것이 꼭옳다고 할수없느며 이에대해서 반론이나. 좋은 자료가 있으신분은 반남박씨 홈페이지를 통해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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