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휘 박인서 사종숙 그리고 하고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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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7:15 조회1,975회 댓글0건본문


우리가문에 자랑 같아 쓸까말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글을 쓰니 잘못된 점이 있더라도 봐주시고 넒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종인들께 부탁드립니다.
휘 인서 족숙께서는 초명은 계서 자는 계화 판관공 18대손이며 소고 휘 승임承任 소고嘯皐공의 14대손으로 병술 1886.12.19일 경북 봉화군 상운면 내림2리 임고에서 출생하심 지금은 행정개편으로 영주시 이산 면 내림.
1919년 년
3·1운동 (한국 역사) [三一運動, 기미독립운동
영주 봉화지도자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시다가 체포 마포형무소[경성형무소, 마포교도소]에서 2년 복역하시고 출감 후에도 비밀리 독립운동{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을 계속 하셨으며 1945년 5월 신사참배 반대운동하시다가 재수감 8.15 광복으로 출감하심 저에게는 사 종숙이며 같은 동내에서 출생 하시어 독립운동 활동을 잘 듣고 잘 알고 있습니다.
외동아들로 초대
이승만 (한국 대통령·독립운동가) [李承晩]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 하신 호 소운 박찬일씨 에 부친입니다.
지금 서대문형무소에 가보십시오 애국지사 들을 수감한 한 감옥 지금도 전시 하고 있습니다.
햇빛도 들어오지 앓는 감옥 몸도 잘 움직일 수없는 좁은 공간 음식이란 보리밥에 콩 섞은 밥 특히 독립투사는 정신적으로 고통을 밭고 철두철미한 유교집안에서 하느님 찾는 기독교인 되었으며 지옥 같은 생활을 하시고 또 나와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재수감 되었으니 얼마나 나라독립을 갈망 하셨겠습니까?
박회무檜茂육우당(六友堂)의 둘째 손자 집은 손(孫)이 귀해 몇 대를 외동으로 내려오다가 휘 인서 사 종숙 부친대 와서야 형제뿐인데 백부 되신 분이 성균관(고려·조선 교육기관) 진사인 호 청하 초 휘 영진(종중 개명으로 영(泳)자 항렬을 승(勝)자로 개명)승진 이십니다.
삼종 조 휘 승진 진사께서는 우리 종중 갑자보 할 때 판관공파 대표로 삼남 도유사로 옷 보따리를 싸들고 그 당시 도유사인 박기양씨 댁에 가서 오랫동안 기거 하면서 수고 하셨으며 인서 사종숙 사촌 되시는 호 향전(香田) 휘 난서 사 종숙께서는 고덕 평도공 산소에 신도비 묘전비가 너무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모 되어 한자도 해독 할 수 없어 판관공파 주도로 다시 만들 때 뒤에서 지휘하시고 현제 평도공 분묘 옆에 서있는 묘전 비를 찬(撰)하시고 찬일 형님 숙부께서 무후 하셔서 휘 난서 씨 셋째 아드님 찬시 씨가 양자로가 찬일씨와 4촌간이며 찬시씨는 승서씨 홍서씨 도유사 때 감사로 오래 동안 대종중에 봉사 하셨으며 요즘도 대종중 승호씨 께서 만날 때마다 찬시씨 안부를 묻습니다.
대종중 어려운 일 있을 때 마다소고嘯皐공 육우당등 직계할아버지들 공로가 많으나 종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휘 인서(仁緖)사종숙 사위는 그 당시 삼성 재벌 이병철 (한국 기업가) [李秉喆]
씨와 우위를 다투는 삼호 재벌 조선방직 삼호방직 대전방직 등 대그룹 사주인 정재호씨 였으며 자(子)는 대통령 비서실장인데도 수년간 그렇게 고생하시고도 독립 유공자 신청도 아니 하고 원호처 에서 재판 기록을 보고 훈장 애족장을 만들어 놓고 유가족을 찾아 다녔으나 못 찾아 신문 광고를 하여 주손 정우씨가 보고 인척 문일씨가 훈장을 찾아옴.
휘 인서씨 백부 박진사댁 도 진사공이 작고 하셨는데 장손자가 영주 신간회 (한국 항일민족주의 조직) [新幹會]
청년 동맹 격문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안동 형무소에서 대구 형무소로 이감 작고하신 혼(魂)도 마지막 저승길도 못가시고 장손자 사종형 찬도 형님을 기다리느라 청하공 시신을 대렴한 채 마당에 석달동안 모셔놓아 그때가 여름철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는 이야기는 들었고 장손은 체포될 때 만18세 이며 8개월 감옥 사시다가 출감 할 때 19세였다니 참으로 슬픈 이야기 입니다.
그 당시 육우당 둘째 손자 주손 인서(隣緖)동명 이인과 사종형이 같이 구속 위 동아일보 소화 5년2월9일 3월16일 안동 감옥 에서 대구로 압송 조선일보 에도 영주 신간회 청년 동맹 격문 사건을 크게 취급함 (위 소화4.5년 동아.조선 일보 신문참조).
사종형 찬일씨께서는 삼호 재벌 매부 덕분에 일본서 대학을 마치고 국비생으로 미국 주립대학 유학 가 귀국해서 처음에는 연세대학교 정외과교수 이었는데 하회 남촌댁 유태하 씨 권유로 청와대비 서관으로 자리를 옮김 마지막에는 비서실장으로 자유당에 부정선거를 하면 안 된다고 적극 말였으며 내무부장관 주도로 부정선거 강행 몸도 건강치 못한 이기붕 (한국 정치가) [李起鵬] 씨를 부통령으로 추대해야 고령인 이승만 대통령 직을 계승 할 수 있으니까 부통령을 부정선거 한 것입니다.
대통령은 야당 조병옥 (한국 독립운동가·정치가) [趙炳玉]
박사께서 입후보해 유세 중 암으로 병원에 입원 중임으로 대통령 이승만은 당선 된 것이고 분수에 넘치는 이기붕씨 과한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자초했는지 우리 세대는 보았습니다.
결국 일가족 4명이 이승만대통령에 양자간 맞아들 이강석씨 총탄에 죽고 자유당(대한민국)정권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배경(빽)이면 다 돼는 세상인데 찬일씨는 당숙 한분 계시고 6촌 4명 그리고 사종인 우리 집과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으나 친척 이라고 덕본일 없고 다 된 일도 친척인지 알면 도리어 손해 보았습니다.
그 당시는 섭섭했으나 전두환 (한국 대통령)[全斗煥]이 그만두고 동생 형 4촌 6촌 친척 다 잡혀 가는 것을 보면서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하자 구황실 재산을 국유로 환수하라고 하여 박찬일씨는 운현궁은 안 된다고 말씀드리니 대통령은 운현궁도 한때 대원군 섭정 때 정치 산실이라고 국유화 강행을 요구 찬일씨는 국유화를 반대해서 박찬주여사에게 돌려 주었다는 이야기는 수차 들었습니다.
직장 그만두고 종종 찾아보았는데 20평 시영 아파트에 사셨으며 마지막에는 포천 깊은 산골찌기 전기 불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 살다가 미국이민간아들에게로 가 2년 전 작고하시고 살아계시면 신유생(辛酉)이니 금년 88세입니다.
그 아버지 독립유공자신청만 하였다면 여러 남매 학비라도 감면 밭았을 텐데 그것 마저도 도움 밭지 않은 청렴한 선비였습니다.
우리 집도 종조부(할아버지 형)과 항상 인서(仁緖)사종숙 과 같이 다니면서 독립비밀 단체에 가입 하셔서 군자금 모금 비밀 문서전달 등 중요한 일을 하시면서 영리하시고 발 빠른 종조 부 어른이라 일경이 항상 감시하고 따라다녔으나 잡지 못하고 아무 욕심 없이 선영을 지키고 주경야독하신 우리 할아버지가 형 백부님을 비롯해 친척 때문에 일경과 그리고 해방 된 뒤에도 경찰에 많은 수모[受侮]를 당하고 살았습니다.
일제 때 우리 식구 먹고 살기는 부족함이 없는 누대를 내려오든 문전옥답도 형님 하자는 대로 해 어디로 갖는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아버지 8남매 손자 등10식구가 넘는 대 식솔이 하루아침에 끼니를 걱정 하는 신세로 전락 했으며 어려운 살림살이를 할머니께서 시숙을 원망 하면서 원망을 하면 안색이 변해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집안이 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호통을 치시든 할아버지 지금 눈에 선한데 세월은 물같이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50년도 넘었으나 명절이나 가을 시제 때는 참보고 싶습니다.
독립 운동을 하면 삼 대가 망한다는데 나까지 영향을 받아 어린시절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무척 고생했으며 지금도 가난을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일제 때 어느 날 하루는 집에 종조부가 오셨는데 어찌 알고 수많은 일경이 갑 짜기 들이 닥치니 종조부께서는 울창한 산으로 도망가시고 총을 쏘고 따라가도 도 잡지 못하고 한참 후에 돌아와 분풀이를 할아버지에게 해 마당에 꿇어 안치고 칼을 목에 대고 형님 행방을 대라고 협박하다가 끌다 십이 주재소[駐在所]로 데려가 그 이튼 날 오셨는데 손에 멍 자국이 있는 걸로 보아 무척 시달인 것으로 짐작함.
아주어릴 때 너무 충격 밭아 지금도 기억 하는데 조부께서는 남은 거라고는 시골 양반 체면과 자손 심뿐인데 그 수모를 겪고 얼마나 비통해하셨을까 글 쓰는 이 순간 밤이 깊어 오경[五更]이 가까운데 조부를 생각하면은 눈물이 앞을 가려 어린애 같이 눈물을 훔치면서 이글을 쓰고 있습니다.
전 고려대 교수이고 유명한 시인이신 고 조지훈 (한국 시인) [趙芝薰
씨 부친은 한국민주당(한국 정당)[韓國民主黨, 한민당] 국회의원 6.25 사변으로 부친은 납치당하여 북에 있고 삼촌 조준영씨 대구시장 경북도지사 경북 경찰 국장 등 두루 역임 했는데 좌익 청년 들이 조지훈 조부에게 아들 조준영 어디 있는가 묻고 반말 짓거리 협박을 하니 수모를 참지 못해 영양 주실 조씨 종가를 지키든 종손 조인석 옹은 그날로 동내 저수에 투신자살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아마 동내 저수지라도 있었으면 잘은 몰라도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 합니다.
그 어렵든 시절 막내고모 혼사 말이 있었는데 우리와 같이 살림살이가 어렵고 한집은 부자 집으로 할아버지는 살림살이가 어려운 집을 택해 백부를 비롯해 부친 등 모두 반대 했는데 할아버지 혼자서 고집을 부려 결국 그 집으로 시집보내면서 하신 말씀 혼인은 사람 같은 사람과 사돈해야한다고 하신말씀 오랫동안 이해 못했고 막내 고모는 없는 살림살이로 한평생고생 했는데 그 집도 우리 집같이 한때는 넉넉 했는데 왜놈들이 성을 일본식으로 고처라 농사지으면 과다한 공출강요 하니 보기 실타고 전 재산을 몽땅 팔아 만주로 간다고 했는데 만주로 떠나지 않고 땅 판돈 행방을 알 수 없었는데 수년전 그 당시 안동 의병운동이 의병장 초대의병장 권세연 선생 중심으로 뜻있는 우국 청년 들을 모병했는데 군자금 모금 비밀장부가 발견 되 그 당시 땅 판돈 전부를 다 희사하고 가족들도 전혀 모르고 정부에서 건국 포상을 고모부가 받아 고종사촌이 가지고와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집이 이종이 한 장으로 70년간을 고생했습니다. 하고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고 나는 한참 깊은 생각했습니다.
우리재산도 아마 그런 데로 쓰였으리라 생각하면서 할아버지에 깊은 뜻을 고희가 다된 이제야 알았으니 할아버지도 누구 못지않게 이 나라를 사랑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그런 문서가 발각되면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봄으로 보통 불에 태워 없애버린다는데 뜻있는 사람이 언젠간 알리고자 깊이 감추어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순사 앞잡이 밀정 이런 자들이 해방 조국에 다시 순경이 되니 반발로 많은 애국지사 들이 사회주의를 지지해 국가로부터 인정 못 밭고 있는 더 많은 지사 들이 있으니 독립운동 역사는 새로 정리해야 된다고 사료됩니다.
친일파 이00은 0이씨 가문에 학식도 풍부하고 글씨도 잘 써 독립문 글씨가 이00 글씨라고 하는데 확실한 고증은 없고 내각 총리대신을 삼년이나 한자가 어찌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을 설수 있으며 총리란 자가 국민을 생각했을까 나라를 판 자금으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항상 암살하려고 하는 자객이 뒤따랐고 죽어서 익산 어느 곳에 묻쳤 다는데 주민들이 알고 묘를 파제키니 자손들이 몰래 묘를 파서 화장해서 버렸다는 것이 사실인지 알고 싶고 매국노들은 자손이 조국에 살지도 못하고 일본으로 도망가 몰래 들어와서 조상에 산소를 파서 화장해 없애거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옮겨 묻어 둔다고 합니다. 또 조상에 산소에 비석을 없애버리고 누구의 자손이란 것이 발견될까봐 성묘도 못 와 묘 등에 나무가나 실전된 산소도 많다 하니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어찌 죽어서는 조국에 반에 반 평도 안 되는 묻힐 땅도 없단 말인가?
친일파 송00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금으로 호의호식하면서 첩을 여럿이나 두어서 얼마 전 부평에 큰 땅을 적자 서자가 나타나 서로 가지려고 법정까지 가서 떠들다가 정부에서 알고 일본 시대 때 작위 받은 자 또는 부역한자 재산을 정부에서 몰수한다고 하니 친일 분자 재산 청산이 일찍 했어야 했는데 때늦은 감은 있으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친일 행각을 한 유명인사를 찾아다니면서 창씨개명 (일제강점기 역사) [創氏改名]까지 한걸 알고 깊이도 조사해놓은 고려대학교 임교수는 세상을 떠나고 다시 삼천여명이 넘는 친일파 [Chinilpa, 친일 인물]인사를 심사 중에 있다니 그중에는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요 정말 악질로 친일한 자는 역적이 문제가 아니고 한국역사가 있는 한 이자들은 응징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는 나치 독일에 협조한 인사는 공소시효없이 가차 없이 처단한다고 하니 민족과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을 어찌 용서하랴 .
어릴 때를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내가 난 고향은 제 13대조 육우당 휘 회무께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선비로서 책을 덮고 용감히 나와 싸웠으나 병자호란(조선 역사) [丙子胡亂]에 인조(조선 왕)[仁祖, 능양군]이
청 홍타이지 [Hung Taiji, 숭덕제, 청 태종] 에무릎을 꿇는 치욕을 듣고 북쪽을 향해 사배 하고 통곡하고 들어간 조부소고 선조 선영하 임고에서 처음 묘 옥을 짓고 교제도 끓고 살든 그 집 그 터에서 저는 태어났으며 누대를 직계선조에 출생지입니다.
그곳은 이상하게도 영주 땅이 되었다가 봉화 땅 되었다가 참 이상하게 생각 했는데 봉화는 안동부 봉화 현이라고 하니 그래서 안동 명문들과 주로 통혼 한 것 같고 도산 서원 유회도 참석치 아니 하였나 생각합니다.
육우당 선조께서 유독 기대를 걸던 둘째 손자 휘 인기(仁基)경자년 식년시에 합격 했을 때 소고선조가 경자 년에 합격하셔서 판관공 전 문중을 전국에 알렸고 둘째손자에 큰 기대를 했는데 예조좌랑으로 발령받고 휴가로 고향에 돌아오시다가 전염병 천연두(병리학)[天然痘, smallpox, 두창, 마마]에 걸려 집에 돌아와 돌아가시니 육우당 노년은 더욱 쓸쓸 했으며 고독했으리라 생각 됩니다.
집 뒤 아주 큰 소나무 한 그루가 홀로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육우당이 심었다고 조부에게 듣고 엄동설한 [嚴冬雪寒)에 눈이 많이 와 횐 눈을 덮어쓰고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장부에 지절[志節]을 말하는 것 같고 그 소나무도 늙어늙어 가고 없다. 옛 추억은 한국 전쟁[25사변, 6.25동란, 6&...]전 동내 나무꾼이 호랑이 새끼를 한말이 잡아와 어미 호랑이가 밤에 찾아와 큰소리로 울던 기억도 있고 늑대가 대낮에도 가축을 잡아 가던 일 호랑이가 온다해도 무섭지 아니 하였는데 일본 순사[巡査]가 온다고 하면 더 무서워했던 추억, 육우당 가훈에 비의사(非義事) 옳치 못한 일은 절대하지 말라했는데 다지키 못한 것 같고 선조님 들은 서인들에 인조반정으로 벼슬길은 멀어지고 이인좌의 난(조선 역사)[李麟佐 ── 亂,무신란] 때 그 이듬해 남인의 본부인 안동에 와 내년 4월소론 강경파들이 혁명을 하는데 봉기[蜂起]하라고 일방 적인 통고를 하고 같답니다.
남인들 의논결과 그것은 안 된다 나라를 뒤집는 일은 역적이다.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딱한 사람이 참여해 사대부들에 혁명은 비참하게 끝나니까 안동놈들 때문에 실패 했다니 참으로 가소로 운일 이며 큰 뜻은 다포기하고 벼슬길은 점점 더 멀어지고 집권 세력과 외척은 점점 더 부패해 벼슬을 매관매직 하고 돈 주고 산 관리는 본전을 뽑고자 토색질[討索질]해 국민을 못 살게 하니 동학(한국 종교)[東學]민중 봉기가나 일본같은 열강을 끌어들여 관리란 자들이 나라를 일본 놈들에 갖다 바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망하니 비통해서 자살한 애국지사가 27명 만세 부르다가 총에 맞아 죽은 자 늙은 부모를 두고 징용 (한국 일제강점기 역사) [徵用, 강제징용
에 끌려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 정신대(일제강점기 역사) [挺身隊]
끌려가 몸도 인생도 망친 여자들 숫한 애국지사들 감옥에서 옥사 하고 또 고생한 사람들 한반도 를 반으로 잘라 지금도 고통 밭고 있는 원인은 왜놈들 때문입니다. 이런데 어찌 천년을 두고 매국노 들을 용서 하겠는가?
선조들에 행장(고려·조선 기록) [行狀]을 읽어보니 동생은 외동아들이라도 큰댁 형님 에게 양자로 주고 동생은 촌수도 없는 먼 일가를 양자로 데려다가 대를 잊고 조상에게 물려 밭은 재산은 동생은 형님은 봉제사 손님 접빈 등 나 보 더 많은 재산을 갖아야한다고 더 주어도 동생은 사양해도 형은 새로 살림나는 동생이 나보다 더 재산이 더 필요 하다 고 서로 사양하고 사는 집도 똑같은 집을 지어 옆에서 서로의지하고 우의 롭게 살아 왔는데 언제부턴지 형제간에 재산 문제로 서로 싸워 왕래도 없고 문중 에 소 종손 이란 자는 문중 재산을 송두리 체 자기 재산인양 자기 앞으로 등기해놓고 주손 이란자도 지손 몰래 문중 위토를 팔아먹고 이러고도 어찌 종손 주손으로 대우를 밭기 바라 며 수백 년 전 조상에게 물려받은 위토가 어찌 자기 개인에 소유란 말 인고 이것이 바로 망하는 시초 란 것을 명심 해두기 바란다.
이보다 더 한 것은 의론해서 해결 못하고 형제 또는 소문중이 법정까지 가서 훌륭 한 조상에 이름을 더럽히니 어렵고 배고픈 시절에도 드물었는데 이 풍요로운 세상에 이런 추태가 어디 있습니까?
대종중에 종원 교육에 몇 번 참석해 보았는데 참 좋은 생각 이라고 생각 하나 70세가 넘는 사람이 많이 참석해 듣는 것 같고 이 교육이 끝 나면은 고등학교부터 청소년 들을 종중 회의실이나 노강서원 같은 곳에 모아 인성교육등 훌륭한 조상들의 업적 같은 것을 교육 시켰으면 하는 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미래는 기계가 다 해결주고 사람에 인성이 중요한 시대가 꼭 오리라 확신 합니다.
나라나 종중이나 미래는 젊은 청소년 에게 있다고 생각 하면서.
육우당(六友堂 檜戊)둘째 손자 인기(仁 基)직계 선조들은
1) 태평 시대에는 깊은 산속에 몸을 숨겨 몸을 깨끗이 하고 깊은 학문을 닦았고
2) 나라 에 큰 환란을 보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나아가 싸웠고
3) 지조 을 지켜 의(義)를 취하였고 헛된 욕망과 헛된 이름을 바라지 아니하였다
4) 의(義)가 아니면 큰 이익 이 있어도 동조(同助)하지 아니하였고 의(義)를 보고 망설 이지 아니하였다.
2008.7.5
인천우거에서 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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