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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세력의 광해군 죽이기와 약창공 박엽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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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7:09 조회1,8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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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세력의 광해군 죽이기와 약창공 박엽
죽이기

반정에 성공하자 반정 세력들은 광해군과 그의 부인 그리고 폐 세자 아들 부부를 강화도 교도로 귀양 보내는 한편, 박정길 한찬남등 당시 대북파의 핵심 인물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이첨과 정인홍 역시 반정군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대북파 관료들도 광해군 때의 정치적 행적을 심사 받은 뒤 '죄질’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었다. 이 결과 북인계 인물 가운데 6품 이상의 관직에 있던 신료 들은 예의 없이 처벌받거나 쫓겨남으로써 북인은 이후 더 이상 정파로서 조정 내에서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반정세력은 광해군의 군사. 외교 정책을 이끌던 평안감사 박엽과 의주부윤 정준을 붙잡아 처형하였다. 이들까지 전격적으로 처형한 것은 명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곧 반정 세력이 친명 반청 외교 정책을 펼치겠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후금에 대해 많은 지식과 대처 능력을 갖추었던 이들을 처형했던 것이다 조선과 가까운 곳에 주둔하면서 이들의 소식을 들은 명나라 지휘관들은 반정 세력의 이 같은 조치에 찬사를 보냈다.
박엽이 재주와 슬기가 있었으므로 광해가 신임하여 무릇 10년 동안이나 벼슬을 갈지 않았다.
박엽은 재물을 많이 써서 첩자를 잘 이용하였다. 한 번은 지방을 순시하다가 구성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청병이 와서 성을 포위하였다. 그날밤중에 호인(胡人) 하나가 성을 넘어 박엽의 침소에 들어와서 박엽의 귀에다무엇을 말하고 갔다.
다음 날 아침에 박엽이 사람을 시켜, 술을 가지고 가서 청병을 먹이도록 하였다. 또 쇠고기로 긴 꼬치적을 만들어서 청국 군졸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는데,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군졸의 수효와 똑같았다.
[胡] 장수는 크게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박엽을 신이라 하며, 곧 강화한 다음포위를 풀고 가버렸다.
계해년에 박엽의 비장 한 사람이 틈을 타서 귀띔하기를, "지금 조정은 패할 것입니다. 공은 지금 임금이 총애하는 신하이니 반드시 화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니 청국과 내밀히 결탁하였다가, 만약에 조정에 일이벌어지거든 이 지역을 청국에 바치고 일부는 떼어서 공이 차지한다면 자립하기에 넉넉할 것입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화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이에 박엽은 "나는 문관이다. 어찌 나라를 배반하는 신하가 되겠는가."하고듣지 않았다. 노
그 사람은 곧 박엽을 버리고 도망쳤다. 얼마 안 되어서 인조가 반정하여 정권을 잡자 곧 사신을 보내 박엽을 임소(任所)에서 베어 죽였다                    (택리지) 평안도
숙청 작업이 일단락 되자 반정 세력들은 곧바로‘광해군 일기’편찬 작업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은 철저하게 폭군으로 매도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졌던지 이후 수백 년 동안 조선 유생들이 쓴 개인 문집이나 역사책에서 광해군은 폭군의 대명사로 기록될 정도였다.            

(도해 조선왕조 실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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