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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판관 공파 애국 지사 박제선 박제형 박진양 박태양 박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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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7:08 조회2,376회 댓글0건

본문

 

호국에 달 6월 도 마즈막날 대종중 문화제 발굴위원회 간사이신 태서 족숙 께서 영주 출신     독립운동하신 애국지사님 들을 관심을 가져 주신데에 대해서 깊이 감사드리면서 영주출신 애국지사들을 오랫동안 조사한것을 아는데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가문에 자랑같아 망설이다가 대부님들에 숭고한 애국정신을 살아있는 내가 아는데로 알려줄 의무가 있다고 해서 필을 들었습니다.

박제선 박진양은 박태양 부자지간이며 박제선 대부께서 영주에서 대동상회란 위장상점을 경영 뜻있는 동지들과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금하시다가 동족에 밀고로 일본헌병대 분견헌병들이 알고 대동상회와 접촉하는 독립지사들을 일망타진 하고자 하는 눈치를 알고 식솔과 일가들을 데리고 야간도주 하다시피 영주를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만주로 떠났습니다. 그추운 만주에서 제선대부께서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하시다가 체포 옥고를 치루었으며 자 진양대부 태양 대부께서는 중국 낙양 군관학교에
입교 하셔서 군사훈련을 받고 관동군 사령관 암살 군사기밀 탐지등 맹활약 하시다가 만주에서 체포 신의주 형무소로 압송 2년간이나 옥고를 치루시고 진양대부께서는 옥고 휴유증으로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고 태양 대부께서는 출옥후에도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해방후 귀국하셔서 육군사관학교 3기로 6.25전쟁에 참여 하시고 65년에 작고 하셨습니다. 안춘생 전육사교장 광복회 회장 중국 낙양 군관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안춘생 지사께서는 황해도 안악 안태훈 진사에 손자이며 그 유명한 안중군 의사의 아버지이시고 안춘생 지사는 안중군 의사의 조카입니다. 조부 안진사 숙부안중근 안명근등
전가족이 독립투사입니다.

김구(초명 김창수) 임시정부 주석께서 약관에 일본 육군대위를 흉기로 때려 죽여 입으로 물어 뜯어 피를 빨았으며 살인죄로 체포되어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중 탈옥 한때 마곡사에 숨어 지내다가 황해도로가 안중근 집에서 숨겨주어 오랫동안 살았다고 합니다.

박진양 태양 대부께서도 한때 안진사댁에 은신했다는 것을 이번 조사하는중 지우에게 들었습니다. 안춘생지사와 같이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후에도 관동군 사령관 암살을 밀명 띄고 같이 활동했으며 태양대부께서는 해방후 조국에 돌아와 육군사관학교 3기로 입학해서 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하셨고 독립유공자도 처음 안춘생 지사께서 추천하시고 90년도 다시 제선 진양 태양 대부님을 다시 애국장을 추서하심

안춘생지사께서 고령에 노환으로(96세) 보훈병원에 입원해 누워계시고 몇일전 이명박
대통령께서 병원을 찾아가 병문안을 하신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건강하시면은 별세하기전에 자세한것을 물어보고 싶으나 고령에 기억력등 모든것이 혼미해 자세한것을 알수없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마 돌아 가시면 사회장 으로 장사 지낼 것 같음

어찌된일인지 우리 족보에도 빠져있고 새로하는 족보 세적편에 올리고자 후손을
찾고 고령에 문중어른들도 아는 사람하나 없어 영주 본적지에도 찾아가 보아도 후손들에 행방이 묘연하여 여러방면으로 찾던중 대종중 태서 족숙께서 태양대부 아드님 박승옥씨를 알게되었습니다.

기미년 3.1 민족대표중 한분이신 만해 한용운 대다수 33인들이 변절했으나 한용운 지사만 끝까지 무섭도록 지조를 지킨 애국지사입니다. 33인중 어떤사람은 깊이 조사해보니 일본인 밀정으로 전략한 사람을 우리는 속고 존경했으나 만해지사만은 꿋꿋한 지조를 끝까지 지킨 애국지사인데 해방후어린딸이 초등학교를 입학시키고자 호적을 찾아보니 일본식민지 시절에 만든 호적에 신청하지않아 해방된 조국에 호적도 없다는 사실을 신문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꼿꼿한 선비 단제 신채호 선생 머리를 일본 통치하에 머리를 숙이기 싫어 꼿꼿이 서서세수를 했다는 애국지사도 호적에 없고 우리일가중 한분도 호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친일분자 색출 책자를 만들기전에 이런사람들에 호적을 찾아주는것이 순서라 생각합니다. 지금 3000명이 넘는 친일 분자를 심사 중이라고 하니 걱정 스럽습니다 일제 때 살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때 그 실상을 알지 못하니 신중히 심사 해야함니다

제선대부 진양대부 태양대부 삼부자께서는 족보에도 빠지고 증조부 휘 예선(禮璿)씨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태양대부 자제분 승옥씨는 37년생으로 조부 아버지가 돌보지 못해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서 자라 한때 달동네등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열심히 공부해서
국민학교 전교수석 중학교 전교수석 고등학교 전교수석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모대학에서 30년간 봉직하시다가 퇴임후 고등학교 선생이신 부인과 서울 모처에 살고
계시고 딸 승련씨는 전총무처 차관 소청위원장 그리고 000지사를 2번이나 하신
우모씨부인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본인들이 독립투사자제인것을 자랑하고 싶지 아니한듯하여 후손들을 찾아 물어보고 이번 족보 세적편에 올리고 족보에도 참여 시켜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국가에서 인정한 공로를 공개하니 후손께서는 양해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세적 편 정리를 위임밭아 정리 중에 있기 때문 임니다

휘 박제형지사

박제형 지사 호는철우 휘는제형 앞에서 소개 했듯이 판관공 손자3파중 장파 휘침에 후손이며 신간회 청년회장으로 심산 김창숙웅과같이 행동 하시고 (심산성균관 대학 설립초대 총장 독립 운 동을 하시다가 해방될때까지 감옥생활을 하시고 일본인들이 반성문만 쓰면 출옥하게 해준다고 해도 반성문을 쓰지 아니하고 해방될때까지 옥중 생활을 하심 ) 오랫동안 감옥생활로 인하여 몸을 잘가눌수 없는 감옥에서 앉음뱅이가 되다시피 하여 해방후 출옥함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수틀리면 재떨이를 집어 던질만큼 꼿꼿한 선비이며 돌아가시자
대한민국 사회장으로 장사지냄 심산문집을 읽어보았는데

부모님 이 세상떠나도 장레식에 참여 하면 체포 될 까봐참여못하고 땅을 치고 통곡하시고신간회 주도로 파리 평화회의의 유림대표 호면우 곽종석(홍의장군 곽재우 후손임) 호 유천
이만규 (향산 이만도 동생임) 137인이 조선 독립 청원서를 파리 평화 회의에 비밀로 올린사건임 유림대표 도망간 소수를 빼고 전원 체포되어 성산감옥에 수감됨

박제형 대부께서는 파리평화 회의의 청원서 올린 사건에 중요한 역활을 하시고 체포되어 성산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제형대부께서 출옥 후에도 성동이란 침목 단체를 만들어 뜻있는 지사들과 모여 독립에 관한 의견을 나누시고 영주 불우한 소년들을모아 조선 역사를 가르치고 청년들에 독립사상을 가르침 양조장 인쇄소 등을 경영하시면서 사비로 젊은 청년들을 교화함

철우 방조 께서는 장남으로 휘원양 차남 돈양 장손으로 승억 승덕 씨가 있으며 장남
원양 대부께서는 면장을 역임 했으며 차남 돈양께서는 경북 여러 고을 군수 그리고 안동등 여러 시에 시장을 하셨고 장손 승억씨는 영주 시청 국장으로 정년 퇴임하시고 동생 승덕씨도 학교 행정관으로 정년퇴직 하심
모두가 청렴한 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으며 남에 독립운동 하신분을
찾아주면서 아버지 조부에 일은 뒤로 미루고 얼마전 정부에서 알고 건국훈장을 표창받음

국립묘지 갈수 있으나 고향을 떠나기 싫어 하신 고인에 뜻에 따라 묘비하나 없이
쓸쓸한 묘를 사진에 보고 참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호연민 이가원 박사가 생전에 써놓고 가신 묘갈명이 있으니 판관공 문중에서 묘비 건립운동이라도 해야
할줄로 생각하며 대종중에서도 협조 부탁드립니다. 가신 분은 말이 없고살아 있는 우리들에 임무 라고 생각 함니다 면우 곽종석 지사 깨서는 유림 대표로 서명 하시고 7ㅇ 고령 에 이제 죽을 자리을 찾앗다고 말씀하시고 3년 언도 를밭고 옥중 에서 병을 얻어 가석방 으로 사망 하시니 전국 유림이 슬퍼 하고 유림장 으로 장레을 치루니 식 자들은 그 깊은 학문과 노스승을 잃은 슬품이 더커다고함니다 인천우거에 서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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