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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조선일보 '반역의 책들이 조선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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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우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7:01 조회1,9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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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책'들이 조선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
이민희 지음|글항아리|384쪽|1만5800원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시간 : 2008.06.13 14:52 / 수정시간 : 2008.06.14 07:22



▲조선시대 두 선비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그린 조영석(1686~1761)의〈설중방우도〉(부분). 방 한 켠에 책이 가득 쌓여 있다. 글항아리 제공
1702년(숙종 28년), 74세의 서계(西溪) 박세당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죽을 날짜 받아 놓은 늙은이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이제 할 말은 하고 가야….' 그는 오늘날 '반(反)주자학적인 경학 사상을 체계화해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한 학자'로 평가된다. 한 마디로 성리학이 정통 이론으로 지배하던 조선의 사상계에서 상당히 이단적인 인물이었다.

마흔 살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것을 끝으로 초야에 묻혀 책을 읽고 제자를 가르치는 것으로 소일해 온 그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정통 사상을 끌어안고 있던 주류 세력에 대한 비판이었다. 박세당은 1663년(현종 4년) 청나라 사신을 마중 나가는 자리에 못 나가겠다며 드러누워 버린 김만균을 탄핵했고,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 세력은 효종 대의 북벌론을 다시 들고 나와 김만균을 탄핵했던 박세당을 공격했다. 박세당이 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그들과의 싸움에서 밀려난 측면도 있었다.

그런데 '조선왕조 굴욕의 상징'과도 같은 삼전도비의 비문을 썼다가 공격 받았던 이경석의 손자가 박세당에게 할아버지의 신도비문을 찬술해 줄 것을 부탁했다. 여기서 박세당은 "송모(宋某)는 거짓을 행하고 그릇됨을 순종해 세상에 이름이 있는 사람"이라며 이미 세상을 떠난 송시열을 공격했다. 노론은 잘 걸려들었다는 듯이 박세당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빨리 명하시어 박세당이 지은 사서주설(四書註說)을 거두어 물이나 불에 던져서 그 근본을 끊으소서."

노론 세력이 상소를 올린 계기는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이 모욕당했기 때문인데, 여기서 왜 박세당이 지었다는 '사서주설'이 등장한 것일까?

그 책은 바로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이었다.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주해하고 《상서》와 《시경》에까지 손을 댄 이 방대한 저작에서 그는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주자는 "성(性·만물의 존재의 본질)은 리(理·우주의 본체)"라고 했지만 박세당은 주자의 가장 기본적인 이 명제를 거부하고 "객관적 자연인 물(物)과 도덕적 주체인 인간은 분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와 송자(宋子·송시열)를 숭배하고 있던 노론은 결코 이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고, 그 논의가 제자들에 의해 세상에 퍼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1703년, 75세의 박세당은 마침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저 유명한 오명(汚名)을 쓰고 유배를 당하게 된다. 넉 달만에 풀려나긴 했지만 곧 세상을 떠났다.

《사변록》은 농서인 《색경(穡經)》과 함께 불태워지는 화를 입었지만 후손들에 의해 다른 필사본이 보존됐고, 새로운 학문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 있는 자들의 용기를 북돋웠다고, 이 책의 저자는 평가한다.

이 책은 15세기로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역사 곳곳에서 등장해 갈등을 빚거나 색다른 의미를 빚었던 '이단적인 책'들에 대한 13가지 이야기다.

'불온한 책'의 역사는 중종대인 15세기 말로 올라간다. 한때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얘기도 있었던 채수의 《설공찬전》은 불교 윤회사상과 왕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는 이유로 불태워졌는데, 이 사건은 이후 조선 소설이 유교 이념으로 천편일률화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선조 때의 병법학자 한교는 《무예제보》 《연병지남》 같은 '조선 지형에 맞는 병법서'를 저술했지만 '너무나 내밀한 군사 현실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탄핵된다.

청나라 주린이 지은 《명기집략》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출신에 대해 잘못된 기록을 싣고 있었는데, 영조는 이 책을 유통하거나 읽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피바람을 일으켰다. 그 중에는 탕평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고종 때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 온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조선이 러시아를 견제하고 미국·일본과 연대하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전국의 '보수' 세력을 결집시켜 척화(斥和)를 외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됐다는 것이다.

수많은 자료를 동원해 사상사(思想史)의 이면을 무척 흥미롭게 보여주는 이 책의 전제는 놀랍도록 단순하다. 조선 전 역사를 통틀어 성리학이라는 단 하나의 이념이 조선 사회를 지배했고, 500년 조선사는 상상력이 억압된 통제 사회였으며, 조선 유학자들이 이질적인 사상을 처단해 간 것은 중세의 마녀사냥과 같았다는 것이다. 성리학이 실제로 국가를 운영한 사람들의 기본 이념이었다는 사실과, 조선 여인들의 소설읽기 열풍과 18~19세기 백과사전 저술 같은 것은 오히려 조선 사회가 일원적인 이념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방증이 된다는 것을 이 책은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대목도 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심양장계》를 다룬 6장은, 《심양장계》라는 것이 시강원(侍講院)이 보낸 장계를 나중에 책으로 묶은 것일 뿐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이 어떤 '책'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의아하다. 9장의 주석 13번부터 22번까지는 미주(尾註)만 있을 뿐 정작 그 본문은 없는데 편집상의 실수로 보인다.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글항아리)을 쓴 이민희 아주대 강의교수 인터뷰.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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