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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충언 겸허히 존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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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형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6:49 조회1,7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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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충언 겸허히 받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제 입장에서는 조상뿌리찾기에 촉각이 곤두세워 있고, 족보에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분들은 최근 8차 족보제작 준비에 있는 시기라 분주하고 민감한 시기에 공교롭게도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도 지적해 주셨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표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 이러한 것이 글로만 서로 의사를 전하는 인터넷 문화의 한계도 같습니다.)

저희 집은 족보가 없어 말씀대로 1권 108면 師恭 선조님 기록 ‘以伯父之罪謫居箕子島今安佐島始居’를 확인하지 못해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여러 어른들께 심려만 끼쳐 드린것 같아 송구 스럽습니다.

말씀 하신데로 '수록(收錄)'이란 것도 참으로 복잡 미묘하고 어려운 작업 같습니다. 후세대에서 모든 역사는 문자화로 기록된 것으로 평가합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때에 두(甲,乙) 인물을 "친일파냐?, 아니냐?"의 논쟁을 놓고 생각해 본다면, 요즘 신세대가 그 시대를 직접 살아보지 않는 이상, 甲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민족적 신념을 갖고 살았어도,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한 번쯤 신문사설에 일제를 약간 옹호한 듯 한 표현을 했으면, 우리는 이것을 '친일파'다 라고 추정할 수 있고, 일제 뒷꽁무니만 따라 다니면서 적당히 요령껏 자기조절만 한 乙은 기록화된 자료가 없으면, 친일파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추정하는 크나 큰 착오를 범하기 쉽다고 봅니다.

우리 반남박씨 족보뿐만 아닌 일반적인 보학에서도 대부분은 무난하게 정상적으로 계보를 이어가겠지만, 수록(收錄)문제에 있어 후대에 가식적으로 족보에 등재를 원하는 사람들과 역사의 흐름속에서 불가피하게 족보상 기록이 안 된 사람들을 구분하고 등재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후대의 작업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추정은 추정에 불과하겠지만, 사공(師恭)할아버지가 경신보 이전 기록에는 세상을 떠난 해가 무신사태(1728) 한 해(1727년)전이고 동생 사묵(師묵)등 종형까지 모두 형벌을 받았는데 혼인까지 하고, 공교롭게도 무신사태 1년전 18세 사망하고 무후(无后)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다른 형제나 친족들은 요즘으로 말하면, 사법당국에서 정식 확정판결을 받아서 족보상에도 그렇게 기록이 되고, 사공(師恭)할아버지는 섬(안좌도)으로 피신해 집안에서 행방이 묘연해 살아있을 때까지 연좌제 적용으로 처벌을 받아야 했던 조선시대에 사태 1년전인 해에 집안에서 사망으로 처리해 상황을 피하려고 했던게 아니냐(?)는 추측을 해 봅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저에게 답변해 주신 반남박씨 여러 어르신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앞으로 족보와 관련된 반남박씨 보학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따끔한 질책 받아 가면서라도 질의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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