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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잡기에 기록된 문강공의 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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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5 11:53 조회2,0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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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제잡기” 에 기록된 문강공의 묘터

오창공 휘 박동량이 쓰신 기재잡기 중에서

할아버지가 합천에서 5년 만에 돌아가셨는데,
아들 딸들이 어려서 울음소리가 방에 가득하였으며,
큰 아버지(감정공(監正公) 휘 박응천(朴應川))가 겨우 스무살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진주에 사는 생원 이광(李光)과 절친한 사이었다.
작고하신것을 알리자 미투리 신에 대 지팡이를 짚고 20여리 밖에서 산꼭대기를 넘어 찾아 왔었는데 할아버지댁 뒷산에 이르자 큰소리로 큰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장사 지낼 만한 곳을 얻었노라. 너의 아버지가 어질면서도 장수 못한것을 슬퍼하여 자손을 위하여 좋은 땅을 구득하려고 하였더니 이제 과연 구득하였다‘
하고, 이내 내려 와서 통곡하고 갔는데. 지금의 무덤이 즉 그가 정해준곳으로 뒤에서 보는 사람마다 모두 매우 좋다고 하여 동래(東萊) 정씨(鄭氏) 의 산소에 다음 간다고 하였다,

신재 주세붕이 우리 할아버지와 다만 한 때만 좋아했을 뿐이 아니라 부고를 받자 술을 갖이고 무덤까지 와서 제사 지내었다. 큰아버지가 그말을 듣고 급히 올라 갔더니 이미 끝나 돌아간 뒤였으니, 아마 그 연루될가 염려한 것이다. 그 문집 속에 제문 두수가 있는데 모두 제(祭) 지낸 뒤에 우리 집에 주지 않고 가지고 간것이다.


<기제잡기>
기제잡기는 기제 박동량이 지은 야사로서. 시대적으로는 이조 초기로부터 명종때 까지의 이야기, 정사에 빠진 저명 인물들의 뒷이야기들이 작가의 의견을 곁들여 흥미 있게 소개 되어 있다


<박동량>
자 자룡(子龍). 호 오창(梧窓)·기재(寄齋)·봉주(鳳洲). 시호 충익(忠翼). 1589년(선조 22) 사마시를 거쳐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어 검열(檢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義州)에 호종, 그 공으로 승지(承旨)에 승진하였다. 1596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를 다녀온 후 도승지 등을 지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어 금계군(錦溪君)에 봉하여지고 형조판서를 역임한 뒤 1608년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가 되었다. 이듬해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추관(推官)이 되어 죄인을 다스리다가 혐의가 없음을 간파하고 석방될 것이라는 말을 발설했다가 탄핵을 받았으나 용서받았다. 이어 폐지된 호패법(號牌法)을 양법(良法)이라고 했다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 당했다가 곧 복관되었다.
이듬해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앞서 선조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懿仁王后의 능)에 저주한 사실을 묵인한 일과 김제남(金悌男)과 역모를 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자 역모사건은 부인하고 대북파가 조작한 유릉 저주사건을 시인, 폐모(廢母)의 구실을 줌으로써 감형되어 지방으로 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유릉 저주사건을 그릇 시인한 죄로 부안(扶安)에 유배되고 1627년 충원(忠原)에 양이(量移)되었다가 1632년 풀려났다. 1635년 아들 미(토 ) 의 상소로 복관,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기재사초(寄齋史草)》 《기재잡기(寄齋雜記)》 《방일유고(放逸遺稿)》가 있고, 그림에는 《농가풍경도(農家風景圖)》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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