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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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5 11:48 조회2,081회 댓글0건본문

문강공 휘 박소 묘소 11.jpg
문강공 휘 박소 신도비.bmp
나의 아버지 박지원 -박 종 채_
제2부 세상을 경륜하다
봄 가을로 가묘에 시제 (음력 2.5.8.11월에 집안의 사당에 지내는 제사,
그러나 일년에 네 차례 시제를 지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어서
실제로는 일년에 한두번만 지내는 집이 많았다.)를 지내시며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셧다
"중봉 조헌 선생 같은 분은 집이 매우 가난하셨지만,
횐 밥과 나물 국만을 제수로 올리면서도 제사지내는 걸 거르지 않으셨다.
내가 항상 이를 사모했건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가례에 따라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거듭 감격하지 않을 수 잇겠느냐?
아버지는 시제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먼저 중류제(中류祭; 경;대부(卿大夫)가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 ‘중류’는 토지신이다.) 를 친히 주관하셨는데
戶長 (아전들 가운데 우두머리였다.) 으로 하여금 아헌제사때 (두버재 술잔을 올리는일.) 술을 올리는 절차를 헌작이라 하는데 초헌 아헌 종헌등 세 차례가 있다.
초헌은 반드시 주인이 행하며,
아헌은 그다음의 어르이 맡게 되어있다. 을 맡게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제야 사사로운 제사지만 중류(中?)는 이고장의 토지신이기 때문이다”
선조(야천)선생의 묘가 합천군 화양동에 지금 합천군 묘산면화양리 에 있었는데
서울에서 너무 멀어 오랬동안 돌보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안의현감에 부임하셔서 여러차례 성묘하고 제사를 지냈다.
당시 재실 묘 옆에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 놓은집.은 이미 허물어지고 제전 마저 없어진 상태였다.
이에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여러 종친들에게 편지를 띄웠으며,
몸소 주관하여 재실을 세우고 제전을 마련 하셨다.
일족으로서 도내에서 고을 원을 하고 있던 분들 역시 각각 돈을 내어 이일을 도왔다.
재실과 제전을 산 아래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맡길 경우제전을 횡령하고
재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등 이전과 같은 폐단이 있을 것 같아
합천군의 길청 (지방 관아의 아전들이 일을 보던곳)에 소속시켜
청명 (24설기의 하나로 대개 한식과 겹치거나 그하루 전날이 된다, 이날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에 제사지내게 했다.
아버지는 재실 겉 기문이,
이기문은 <연암집> 권1에 합천 화양동 재실의 기문(합천화양동병사기)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잇다.을 친히 지으셨다.
그뒤. 재실에서 제사를 지낼때 합천군 호장이 축문( 제사때 읽어 신명에게 고하는 글
후손이 읽게되어있다. )을 읽았다는 비방이 있었다.
아버지는 족형인 근재공 윤원에게 답장을 보내 그런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해명하셨다.
기문과 편지는 모두 문집에 실려있다.
연암집 권2에 족형 윤원에게 답하는 편지가 실려있다.
박윤원이 연암에게 보낸 편지도 함게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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