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가 천 만 관객을 끌어 모으며 연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광천골 촌장 엄흥도(嚴興道)라는 인물이 영월로 유배된 노산군(魯山君) 이홍위(李弘暐)를 맞이하여 벌어지는 사건을 해학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이다. 배경이 되는 “광천골”이라는 지명과 “촌장”이라는 직함을 비롯하여 단종과 엄흥도 사이에 벌어지는 영화 속 이야기는 8, 9할이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허구이다. 몇몇 야사(野史)에 전하는 단편적인 기록을 제외하면, 영월로 유배된 이후 단종의 삶이나 엄흥도의 생애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문헌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엄흥도가 사대부가 아닌 아전의 신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세조의 찬탈 이후 한동안 단종과 관련된 것은 금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공식적인 역사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엄흥도가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치제(致祭)하였다. …… 사신(史臣)이 또 말하기를 “신상이 돌아와 복명하고, 김안국(金安國)과 함께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노산군의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옆에 있다.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는데, 다른 무덤이 그 곁에 여럿 모여 있다. 고을 사람들이 ‘임금님 묘[君王墓]’라 부르고,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다.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초 노산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 온 고을이 두려워하면서 허둥대었는데, 고을의 아전인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한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그 일을 가슴 아프게 여긴다.” 하였다. <중종실록 11년(1516) 12월 10일 기사>
엄흥도가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단종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지 60년이 지난 시점이다. 단종의 복권(復權)에 대한 논의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이후로 금기시되다가 중종 때에 이르러 사림파(士林派)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종은 우승지 신상을 영월로 파견하여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묘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신상이 돌아와 노산군 묘소의 실태를 보고하고, 아울러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를 지냈다는 영월 백성들의 증언을 전해주자,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엄흥도의 절의를 특별히 기록하였던 것이다.
송시열(宋時烈)이 아뢰기를 "노산군이 해를 당했을 때 시신을 아무도 거두어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고을의 아전 엄흥도란 자가 즉시 가서 곡림하고 스스로 관곽을 준비하여 거두어 묻었으니, 지금의 이른바 노묘(魯墓)입니다. 엄흥도의 절의는 사람들이 지금도 칭찬하고 있기에, 신이 전조(銓曹)를 맡고 있을 때 그 자손들을 녹용하고자 했으나, 그 유무를 알지 못해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그의 자손이 본 고을에도 있고 괴산(槐山)에도 있다고 하니, 그 절의를 장려하는 도리로 볼 때 녹용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찾아 녹용하게 하였다. <현종개수실록 10년(1669) 1월 5일 기사>
사림파가 집권한 이후로 단종 복위(復位)를 시도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사육신(死六臣)과 금성대군(錦城大君) 등에 대한 복권이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다. 엄흥도의 절의를 포상하자는 의견은 현종 때의 산림(山林) 송시열에 의해 경연(經筵)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송시열은 자신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엄흥도의 후손을 찾아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후손을 찾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후손들이 영월과 괴산에 산다는 소문을 듣고는 현종에게 등용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엄흥도의 후손을 등용했다는 후속 기록이 없고, 아래에 나오는 최석정의 언급으로 보아 끝내 찾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석정(崔錫鼎)이 또 아뢰기를 "단종 대왕이 승하하시던 처음에 본군의 호장(戶長) 엄흥도가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장례 의식을 거행하였기 때문에 육신(六臣)의 사당에 배향(配享)하게 된 것입니다. 향리(鄕吏)는 이미 천인(賤人)이 아니며 충절 또한 가상하니, 전에 없던 성대한 전례(典禮)를 추거(追擧)하는 날을 당하여 마땅히 포증(褒贈)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자손이 없다고 하니 만약 낭관(郞官)의 직위에 특별히 포증을 더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나도 또한 들었다."라고 하고는 이에 해조에 명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숙종실록 24년(1698) 12월 16일 기사>
1698년(숙종24) 11월에 이르러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이 마침내 복위되었다. 세상을 떠난 지 242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이 일에 앞서 1691년에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먼저 이루어졌고, 그들을 모신 사당에 “민절(愍節)”이라는 사액이 하사되었다. 사육신을 모신 사당에 엄흥도가 배향되었다는 실록의 기록은 숙종 때부터 일찌감치 그의 절의가 사육신에 버금갈 정도로 높게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때에 이르러 재상인 최석정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엄흥도에게 좌랑(佐郞)이라는 관직이 추증되었다.
영조 때에 이르러서는 엄흥도에 대한 포장이 더욱 융숭해졌다. 1728년(영조4)에는 엄흥도에게 자손이 없어 외손이 봉사(奉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사를 지내기 어려울 정도로 빈한하다는 여필용(呂必容)의 보고를 받은 영조는 세금을 면제해주고 분묘를 보호하라는 명을 내렸다. 1739년에는 영남에 사는 후손을 녹용하자는 박사정(朴師正)의 건의를 허락하였으며, 1743년에는 이주진(李周鎭)의 건의에 따라 기존에 추증한 벼슬을 더 높여 참의(參議)를 증직하였다. 1758년에는 사육신을 제향하는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에 엄흥도를 배향한다는 보고를 들은 영조는 사육신과 함께 치제(致祭)하도록 하는 한편, 참판(參判)으로 올려 증직하고 자손을 녹용하라는 명을 다시 내렸다.
정조 6년인 1782년에는 생육신(生六臣)인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성담수(成聃壽) 등에게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때 정술조(鄭述祚)가 상소를 올려 “엄흥도의 우뚝하고 큰 충절을 논한다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여러 사람들과 백중(伯仲)이 된다고 해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네 신하에게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는 때를 맞아 엄흥도만 누락된다면 실로 흠전(欠典)이 됩니다. 만일 네 사람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은전을 받게 된다면 성조(聖朝)에서 표장하는 도리가 더욱 빛날 것입니다.”라고 하여 엄흥도에게도 시호를 내려주기를 청하였는데, 허락을 받지는 못하였다.
전교하기를 “아, 죽음을 각오하고 의리를 떨쳐서 장사를 지내는 일에 힘을 다한 사람은 오직 엄 호장(嚴戶長) 한 사람뿐인데, 어찌 순절한 사람의 반열에 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혼자만 배향에서 누락시킬 수 있겠는가. …… 증 참판 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15년(1791) 2월 21일 기사>
1791년(정조15)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단종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순절한 신하를 기리기 위해 제단을 설치한 것이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금성대군, 사육신, 엄흥도 등 32인은 정단(正壇)에 배향되고, 사적(事蹟)이 불분명하거나 연좌되어 죽은 198인은 별단(別壇)에 배향되었다. 정단에는 관직에 있다가 순절한 사람 31인만을 배식(配食)하는 것으로 처음에 의견이 모아졌으나, 엄흥도의 절의를 높게 평가했던 정조는 특별히 정단에 배식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고종 때인 1876년에는 마침내 공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렸다. 엄흥도가 행한 의로운 행동을 시법(諡法)에 따라 평가하여, “목숨을 걸고 윗사람을 섬겼다.[危身奉上]”는 의미의 “충(忠)”과 “굳세고 능히 결단하였다.[强而能斷]”는 의미의 “의(毅)”를 합쳐 만든 시호였다. 1900년에는 경상북도에 사는 후손 엄주호(嚴柱鎬)가 상언(上言)하여 엄흥도에게 영구히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은전[不祧之典]을 청하여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그 상언에는 단종과 엄흥도가 처음 만났을 때의 광경을 상상해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단종 대왕께서 손위하신 이듬해인 병자년(1456)에 영월 청령포(淸泠浦)로 옮겨 갔을 때는 마침 늦은 봄이었습니다. 단종께서 근심에 싸여서 홀로 앉아 <자규(子規)> 시를 읊다가 깜빡 잠이 들었을 때에, 홀연 사육신이 꿈에 나타나서 억울한 사정을 하소하였는데 마치 살았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단종께서 꿈에서 깨어 울면서 매우 슬퍼하고 있을 때에 마침 엄흥도가 산마루에 올라 그곳을 바라보고 “청령포에 등불이 환하고 또 무슨 울음소리가 나는구나. 가봐야겠다.”라고 하고는 옷을 벗고 강을 건너 곧바로 그 앞에 나아가 엎드려서 인기척을 내었습니다. 단종께서 울음을 그치고 “너는 누구이며 깊은 밤에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고 물으시자, 엄흥도가 대답하기를 “신은 본군의 호장인데 울음소리를 듣고 놀라서 감히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하였습니다. 단종께서 탄식하며 이르기를 “여기에 와서 머무른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찾아와 위로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네가 찾아왔으니 그 정성이 기특하다. 이제야 초야(草野)에도 선인(善人)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구나.” 하셨습니다. 엄흥도가 그날 이후로 밤마다 찾아가서 뵈었다고 합니다. 정축년(1457) 10월에 단종께서 승하하시자 고을 수령과 종자(從子)들은 두려워서 감히 거두어 염도 하지 못하였는데, 엄흥도는 곧바로 소리내어 울면서 관과 이불을 마련하고 몸소 염을 하여 등에 지고 갔으며, 선산 안의 산기슭에다 손수 묻었으니, 이곳이 오늘날의 장릉입니다. <고종실록 37년(1900) 5월 11일 기사>
사방이 산과 물로 둘러싸인 궁벽한 산골로 유배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신세가 된 어린 임금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상상조차 어렵다. 엄흥도의 방문과 보살핌은 단종에게 분명히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라는 책에는 단종이 지어 읊었다고 전하는 <자규> 시가 실려 있는데,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원통한 새가 궁중에서 떠나온 뒤로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그림자 홀로 푸른 산을 헤매누나 孤身隻影碧山中
잠을 들려 해도 밤마다 잠들 길 없고 假眠夜夜眠無假
한을 풀려 해도 해마다 한은 끝없네 窮恨年年恨不窮
울음소리 끊어진 새벽 봉우리엔 그믐달 밝은데 聲斷曉岑殘月白
토한 피가 흘러내린 봄 골짝엔 붉은 꽃 떨어지네 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 먹어서 애닮은 하소연 못 듣거늘 天聾尙未聞哀訴
어찌하여 서러운 나의 귀만 홀로 밝은고 胡乃愁人耳獨聰
엄흥도는 일개 아전의 신분으로 남들이 두려워서 물러날 때 “선을 행하다가 화를 입더라도 진실로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겠다.[爲善被禍, 誠甘樂之.]”라는 말을 남기고 단종에게 충절을 바쳤다. 그의 절의가 알려진 뒤로는 사육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추숭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나오기 전만해도 사육신은 알아도 엄흥도는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역사에 또렷한 발자취를 남기고도 묻히고 말았던 인물을 발굴하여 감동적인 영화를 만든 분들께 찬사를 보낸다. 한편으로 이 영화의 소재가 우리의 고전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한문으로 쓰인 고전을 애써 현대어로 번역하는 의의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