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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일반 | 문강공 박소(朴紹)와 현량과(賢良科

페이지 정보

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12-31 22:42 조회44회 댓글1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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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오랜만에 대종중에서 교양강좌가 개최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년 35회가 열리는데

새로운 임원이 들어서서는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내용도 좋고 강사님도 좋은 분을 모셨다. 한문을 전공하시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분으로 종중에 많은 도움을 주실분으로 생각된다.

강의는 자운서원(紫雲書院) 원규(院規)” 강사님은 호군공파 박도균(朴燾均=天均)

자운서원은 이이(李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그 뒤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사원의 원규(서원을 운영하는 규칙)를 문순공께서 작성하셨다고 한다.

 

교제, 문강공 박소 할아버지의 내용중에 공()께서

1518(중종 13) 향공(鄕貢) 3과에 모두 장원하고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1519년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마치 공()께서 현량과에 낙방(落榜)하신 것처럼 보인다.

 

 인터넷 다움에서 박소를 검색하면 위와 같은 내용이 출력되며 이내용의 출처 근거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찾을수 있다 .

 

 

 

 

중종 14(1519), 같은해 식년시(式年試)와 현량과(賢良科)      두번의 과거가 있었다

    첫번째  식년시(式年試)

중종실록35, 중종 14320일 계축 3/3 기사 / 1519년 명 정덕(正德) 14

문과의 전시를 출방하였는데, 박소 등 29인을 뽑다

 

두번째     조광조가 천거헌 현량과(賢良科)

 중종실록35, 중종 14413일 병자 1/4 기사 / 1519년 명 정덕(正德) 14

 

천거한 선비를 시책하여 장령 김식 등 28인을 뽑고, 무인 정인 등 46인을 뽑다

丙子/上御勤政殿, 薦擧, 取掌令金湜等二十八人; 慕華館, 試武人, 鄭麟等四十六人

 

     ()께서 급제를 하신 식년시(式年試)320일 실시되고,

23일후에 조광조가 천거(薦擧)한 현량과는 413일에 실시하였기에

현량과에 급제하지 못하고는 사실이 아니다.

 

 이런기록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올라있고.

 

문강공의 잘못된 기록이 또 있다

공께서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나주의 반계서원(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합천의 이연서원이 아닌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이런 잘못된 기록을 수정할수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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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중에 반남박씨종사(潘南朴氏宗史)가 확립되어 있지 않기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들어난다.

종중의 역사를 정립할수 있는 종사연구하는 기관이 필요한데,

종중역사 바로 세우기 연구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此日彼日 미루고만 있다,

시제(時祭), 새롬빌딩 문제로 바뻐서란 핑계다.

 

         세양공 신도비 비문에 의문점이 많은 것은 옛날에 발행한 오류가 많은 반양삼세현창록을 참고로 했다고 하는데

 종중에 제대로 확립된 종사에 대한 문서가 있었다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

족보에 잘못된 기록, 어찌할것인지?

 

 

한담(閑談)

문강공 께서 식년시에 장원급제하여 현량과에 참석안한 것이 큰 다행이다.

현량과에 급제한 김식이하 27인은 남곤 심정이 주도한 기묘사화로 인하여 급제한후 8개월만인 12월에 모두 파방(罷榜=낙방)된다. 조광조 일파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막기위함이다.

 

중종의 아들 인종이 이들을 복과 시켰으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파방을 하였고 선조원년에 영의정 이준경의 상소로 다시 복과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말로는 비침하였디 현량과 장원급제한 김식은 훈구파 세력 때문에 귀양가고 말년에 자결하고 만다

 

조광조와 가까운 사이인 인물들은 모두 피해를 보았으나

문강공은 기묘사화를 어떻게 피해갔을까

()3월 식년시에 장원급제를 하고 7월에 성절사 박영이 표문을 받들고 북경으로 조회가는데, 박소(朴紹)가 서장관으로 함께 떠나, 다음해(1520) 정월 2일에 귀국하여. 문강공 3형제(진사공 관() 유사공 집())의 스승인 송당 박영과 문강공이 기묘사화를 피팔수 있었다.

 

그해 정월 19일에 자친(윤씨 부인)이 돌아가심으로 벼슬을 내려 놓고 영남에서 상여(喪輿)를 모시고 김포(金浦) 선영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고 시묘(侍墓)살이 2년 대상(大喪)을 지낸후 152211弘文館副修撰으로다시 관직에 복직하였다.

공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던 것은 스승 송당 박영선생의 배려로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다녀온 결과가 아닌가 추측을 해본다.

 

댓글목록

允中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允中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태서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사암 박순이 짓고 석봉 한호가 쓴 문강공 신도비명에는
[과거 공부에 힘을 분산한 적이 없었으나 재주가 뛰어나 무인년(戊寅年, 1518년 중종 13년) 가을 향시(鄕試)를 보아 삼과(三科)에 모두 제1등을 차지하였고 그 이듬해 봄에 사마시(司馬試)를 보아 제2등으로 합격하였다. 회시(會試)에서 강석(講席)에 나아갈 때 거동이 차분하고 응대함이 상세하고 민첩하였으므로 제공(諸公)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오늘날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를 얻었으니, 축하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때 조 정암(趙靜庵, 조광조(趙光祖))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강석에 참석하여 말하기를, “그의 인품을 보니,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왜 꼭 정자로만 기대하는가?”라고 하였다. 과연 대과(大科-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자 제공들이 모두 말하기를, “효직(孝直, 조광조의 자(字))이 사람을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이때 공의 이름이 이미 현량과(賢良科)의 추천 속에 들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대과를 보았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옳게 여기었다. 전서(典書)에 임명되었다가 전중(殿中)으로 전직되었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요즘 수능시험에서 학교장 추천으로 수시 원서접수를 했으나, 정시에서 1등을 차지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입니다.
이미 현량과에 추천되었는데도 1519년 3월에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므로 4월에 발표한 현량과 합격자 명단에는 빠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라고 불합격으로 표현한 것은 잘못입니다.
또한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은 화암서원(華岩書院)으로 수정해야 합니다.
현존하는 대구의 화암서원(華巖書院)과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진 합천의 화암서원(華岩書院)은 한자를 다르게 쓰며, 제향하는 인물이 다릅니다.
1개월 이내로 수정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현량과(賢良科)는 1519년(중종14)에 천거와 시험을 접목하여 시행한 특별 과거이다. 문과는 서울과 지방에서 추천받은 이들을 대책으로 시험하여 28명을 선발하였고, 무과는 46명을 선발하였다. 현량과는 조광조를 위시한 기묘인들의 사장(詞章) 위주의 기존 제도와 관행을 수정하여 경학(經學)을 더 중시하고자 하는 입장이 반영된 과거제도로, 기묘사화 직후 폐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현량과 [賢良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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