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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의견 | 세양공 신도비문 내용의 오류 및 의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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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允中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12-26 09:34 조회13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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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중양절에 세양공파 종중에서 새로 세운 '세양공 신도비명'의 사진을 내려받아 그 내용을 살펴 보았습니다.

신도비 사진은 이달 중순에 받았으나, 한림원 기말고사로 인해 살펴보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읽어보고, 10여 군데에 오류 및 의문점이 있기에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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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면.png

 

1. 신도비 1면 1열 중간에 "후백제의 신라 경주 침략 후 박씨들은 견훤의 탄압을 피해 여러 고을로 흩어져 살았는데 그 중 반남현을 얻어 대대로 세거하며 반남현 호장을 지내신 호장공 휘 응주께서 반남박씨 시조 이시다" 

이는 927년 11월 견훤이 박씨인 경애왕을 몰아내고, 김씨인 경순왕을 세운 때를 말하는데, 반남박씨 대종중에서는 전통적으로 반남박씨의 유래를 금양위 박미께서 1642년에 지으신 임오보서를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임오보서에는 "신라 사직이 망하고 고려 태조가 박씨들을 여러 읍에 나누어 살게 하자, 각자 사는 곳의 호적에 편입되었는데, 금성(전남 나주)의 반남현에 사신 분이 우리 선조이시다" 이는 935년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여 신라가 망하고, 936년 후백제가 망한 후, 왕건이 신라의 성골 및 진골들을 전국으로 흩어져 살도록 했고, 반남박씨 호장공의 선조들은 나주목 반남현에 터를 잡았다는 내용이다. 세양공 신도비와 임오보서의 내용은 어떻게 다른가? 

(1) 반남박씨 선조가 신라를 떠난 시기가 8년이나 차이가 나며(세양공 신도비 내용이 빠름), 

(2) 왕건의 명령에 의해 경주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나 혼자 살겠다고 자발적으로 신라를 탈출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성리학이 들어오기 이전이었다해도 신라 왕족으로서 '존왕양이 애국충정'을 높게 생각했을 박씨들이었을텐데, 내 한몸 편하자고 신라왕실을 등지고 경주를 떠났을까? 더군다나 개성 위례 등 고려의 영토로 도망간 것도 아니고, 후백제의 영토로 도망을 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으며, 비겁한 도망자의 후손이라고 낙인 찍히는 것 같아 기분이 안좋다. 

 ⇒ 호장공의 선조가 927년에 경주를 떠났다는 근거가 없다면, 금양위께서 지으신 임오보서의 내용으로 수정해야 하겠다.

 

2. 신도비 1면 3열 중간에 "공의 조고 문정공 상충께서 익재 이제현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문효공 이곡 문하에서는 목은 이색 . 포은 정몽주 . 삼봉 정도전 . 양촌 권근 등과 사우가 되어 수학하며 신진사류를 형성하였고" 

앞서 태서 형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삼봉 정도전은 가정 선생 문하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없고, 양촌 권근은 가정 선생이 돌아간 뒤에 태어났다. 

 ⇒ 역사적 근거가 없는 내용을 신도비에 기록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수정해야 하겠다.

 

3. 신도비 1면 5열에 "그 중 선두주자로 공민왕 2년( 1353) 대과에서 처남 목은 이색이 장원하고 문정공께서 약관으로 2등하여 성균관 학유로 시사하였고"

  약관(弱冠) 이란 나이 20살을 말하는 것인데, 문정공께서는 1353년에 22세가 되었으니 "그 중 선두주자로 공민왕 2년( 1353) 대과에서 처남 목은 이색이 장원하고 문정공께서는 22세에 아원으로 급제하여 학유로 시사하였고"라고 수정해야 하겠다. 

 

4. 신도비 1면 8열 끝부분에 "배위는 한산이씨로 문효공 가정 이곡의 따님이며, 목은 이색의 누이로 진한국대부인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  아들 평도공이 우의정이 되면서 아버지 문정공은 증 영의정 어머니는 진한국대부인으로 추증되셨을 뿐이다. 국대부인 품계에 같은 품계인 정경부인을 붙이는 법은 없다.(아래 #6368번 게시 글에 승혁 아저씨께서 자세한 설명을 하셨음) 

반남박씨 세보 내용대로 정경부인은 삭제해야 하겠다.

 

5. 신도비 1면 9열 뒷부분에 "생질 박은의 독서를 위해 청향사에 보내면서 목은 이색이 「송박생독청향사」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는데 [ 오생독사린각 내부아룡두 경세주전학 전가여철유 적막산사야 포묘해문추 호학계선지 타년당출유 ] 「 내 생질은 남보다 뛰어나고 그 부친은 장원의 다음이다 세상은 평탄치 못하여 고난과 시련이지만 가문을 전하여 높은 벼슬에 이르리로다 고요한 산사에 밤이 되었는데 멀고 아득한 해변은 가을이로다 총민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선친의 뜻을 따르니 장래 마땅히 출세하리로다」  이 시는 목은집에 실려있고 반남박씨 세적에도 실려있는 글이다.

 ⇒ 신도비는 送朴甥讀靑鄕寺라고 썼는데, 해석하면 '청향사를 읽는 생질을 보내며'가 되겠다. 靑鄕寺를 읽다니? 또한 靑鄕寺라는 절이 있는 것 처럼 썼으나 청향사라는 절은 없다. 목은의 시 제목은 送朴甥讀書鄕寺이다. 즉 '시골 절에 독서하려 가는 생질을 보내며' 라는 '5언율시'로서 전문은 율시가 2개이므로 '5언배율'이라고 한다. 書를 靑으로 오기한 것이다. 5언율시 이므로 매 句는 5자로 돼야하는 데, 첫 句가 吾甥讀似麟角 6자로 되어있다. 讀자가 잘못 들어가 있기 때문이니, 吾甥似麟角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시의 해석도 의역이 많은데, 원문에 충실하게 하는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내 생질은 기린의 뿔(다재 다능함)과 같고, 네 아버지는 용의 머리에 버금갔네(아원으로 급제함). 세상을 경시하다 마침내 구렁에 묻혔으니, 가문을 전하기 조차 위태로웠네. 적막한 산사의 밤이여, 멀고 먼 해문의 가을 이로다. 학문을 좋아하여 선고의 뜻을 이었으니 훗날 마땅히 출세하리라.(출세한 후에 유람하는 것을 出遊한다고 함) 

 

6. 신도비 1면 13째줄 중간에 "공의 선고 휘 은께서 16세 때 진사시에서 장원급제하고" 라고 썼으나, 진사 생원시는 지금의 자격시험과 같아서 及第라 하지않고, 入格이라고 한다. 

 ⇒ 따라서 '진사시에 장원으로 입격하고' 라고 수정해야 하겠다. 

 

7.  신도비 1면 14째줄 중간에 "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 병조 호조의 전서를 지냈으며 조선 정종2년 박포의 반란 평정에 기여한 공로로 좌명공신 금천군에 봉해졌다." 라고 기록하였으나, 반남박씨 세적편 평도공 연보를 살펴보면

(1) 1400년 2월 8일 인녕부 좌사윤. 세자 좌보덕이 되었다. ( 정월 이방원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이때 역신 박포(朴苞)가 또 군대를 동원하여 난을 일으키기를 꾀하였다. 공이 태종을 도와 계책을 세우고 상전(賞典)을 관장하여 그 난을 다스렸다 )

(2) 1401년 1월 25일 익대좌명공신 호조전서가 되었다. 

(3) 1401년 윤3월 7일  병조전서가 되었다

(4) 1401년 4월  이조전서가 되었다

(5) 1401년 7월 25일 추충익대좌명공신 가정대부 반남군 보문관 제학 겸 판전의감사가 되었다.

(6) 1401년 12월 9일 반성군이 되었다.

(7) 1402년 1월  강원도관찰출척사가 되었다

(8) 1406년 1월 25일 전라도관찰사 · 동참지의정부사가 되었다

(9) 1408년 10월 13일 가정대부 참지의정부사 겸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10) 1409년 12월 서북면 도순문찰리사 겸 병마도절제사 평양윤이 되었다

(11) 1411년 7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12) 1411년 8월  호조판서 겸 판전농시사가 되었다

(13) 1413년 4월 정헌대부 금천군 겸 판사재감사가 되었다

(14) 1414년 2월 집현전 대제학이 되었다

(15) 1415년 1월 숭정대부(종1품) 금천군이 되었다 

(16) 1416년 5월 추충익대좌명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수문전 대제학 영경연사 세자부 금천부원군이 되었다.

(17) 1416년 11월 좌의정이 되었다

(18) 1421년 12월 병으로 좌의정을 그만 두었다

(19) 1422년 5월 9일 세상을 떠났다 

 ⇒ 따라서 "세자 좌보덕으로 보임 중이던 조선 정종2년 박포의 반란 평정에 기여한 공로로 이듬해 1월 익대좌명공신 호조전서가 되었고, 이조 병조 전서를 거쳐 7월에는 추충익대좌명공신 가정대부 반남군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반성군으로 개봉되었고, 강원도관찰출척사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라고 수정해야 선후가 맞겠다.

 

8. 신도비 1면 20째줄 중간에 " 47세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수문전 대제학 세자부를 지낸 후 좌의정에 승차하였다." 라고 기록하였으나,  반남박씨 세적편의 평도공 연보에 따라

  ⇒ "47세에 추충익대좌명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수문전 대제학 영경연사 세자부 금천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에 좌의정에 승차하였다." 라고 수정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9. 신도비 1면 21째줄 "세종2년 집현전의 부활을 강력 건의하자 왕이 가납하여 집현전이 부활되었고 초대 영전사를 맡아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시켰는데 그 학자들은 세종시대 과학 국방 문화 등 여러분야에서 큰 업적을 이루었으며 좌의정을 4년 지낸 후 지병으로 사직하였고 금천부원군에 봉해졌다."  반남박씨 세적편의 평도공 연보에 따라 좌의정을 지낸 기간은 6년이며, 금천부원군에 봉해진 것은 1416년 우의정이 될 때이다. 

 ⇒ " 6년간 좌의정을 지낸 후 지병으로 사직하였다." 라고 수정해야 하겠다.

 

10. 신도비 2면 2째줄 "시호는 평도이다. 배위는 정경부인이며 진한국대부인 장흥주씨로 전법판서 주언방의 따님이며" 라고 기록했으나, 위 #4항과 같은 이유로 '진한국대부인' 앞에 '정경부인'을 붙이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 "시호는 평도이다 배위는 진한국대부인 장흥주씨로 전법판서 주언방의 따님이며"로 고쳐야 하겠다.

 

11. 신도비 2면 9째줄 끝부분 "문종1년 강원도관찰사겸 병마절제사를 지내고 문종2년 평안도도진무단종2년 중추원사를 역임하였다" 라고 기록하였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1) 문종 즉위년(1450) 8월 7일 박강을 황해도절제사로 삼다

(2) 문종1년(1451) 1월 3일 황해도 도절제사 박강이 치계하기를, 신이 본도의 금년 주·군의 군적에 나타난 병졸을 고찰하니...

(3) 문종1년(1451) 3월 15일 박강을 황해도 도관찰사겸 병마도절제사 판해주목사로 삼았다

(4) 단종 즉위년(1452) 12월 11일 박강을 중추원부사로 삼았다

(5) 단종1년(1453) 10월 25일  박강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고...

(6) 세조1년(1455) 12월 17일  세자가 강녕전에서 풍정을 올리니, 종친의 영해군이 시연하였다. ~ 도진무 박강 ~ 우부승지 조석문을 불러 술을 하사하였다

(7) 세조1년(1455) 9월 20일 이증을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 계양군으로~ 박강을 추충좌익공신 동지중추원사 금천군으로~ 최유를 추충좌익공신 첨지중추원사로 삼았다

(8) 세조2년(1456) 9월 7일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난신에 연좌된 부녀 중에 ~영손(尹令孫)의 아내 탑이(塔伊)·딸 효도(孝道)이반경(李反敬)의 첩 막생(莫生)은 중추원사(中樞院使) 박강(朴薑)에게 주고,'

(9) 세조6년(1460) 11월 7일 중추원사(知中樞院事) 박강(朴薑)이 졸(卒)하니,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라 "문종1년 황해도관찰사겸 병마절제사를 지내고 단종1년 강원도 관찰사 세조1년 평안도 도진무를 역임하였다"라고 수정해야 하겠다.

 

12. 신도비 3면 10째줄 중간에 "인종 즉위년 손 금성부원군 용의 딸이 세자빈에서 인성왕후에 진봉됨으로 인성왕후 추은으로 인종1년(1545)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라고 기록하였으나, 

법전에 따라 3대가 추증되는 것은 증손자의 품계에 따라 추증하는 것이지 고손녀에 의해 추증되는 것이 아니다. 

금성부원군의 묘비명을 살펴보면, 따님이 세자빈 신분이던 '1524년에 졸하면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에 추증되었고, 1545년 인종이 즉위하면서 영의정 금성부원군에 추증되었다'라고 적혀있으므로, 금성부원군이 대광보국 우의정에 추증되던 1524년에 금성부원군의 부친인 집의공은 아들과 같은 품계인 정1품의 최고위직인 증영의정이 되었으며, 금성부원군의 조부인 세양공은 1단계 낮은 종1품 증좌찬성이 된 것이다. 즉 세양공이 좌찬성에 추증된 때는 인종이 즉위한 1545년이 아니라 손자 금성부원군이 졸한 1524년이 맞는 것이다.

 ⇒ 따라서 "공의 손자이며 세자빈의 부친인 금성부원군 용이 1524년 57세로 졸하면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들 집의공 치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공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라고 수정해야 하겠다.  

 

13. 기타 화담 서경덕이 썼다는 '세조잠저서' 운운은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없어 내용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으나, 신도비의 내용과 달리 조선왕조실록의 세양공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1) 세조1년(1455) 8월 16일 임금이 창덕궁에 거동하여 노산군을 알현하였다. 개국 정사 좌명 정난의 4공신 등이 맹족(동맹을 맺은 서사 또는 그 명단을 적은 족자)을 임금 및 노산군에게 바치니, 임금이 공신들에게 나눠주라고 명하고는 이어서 잔치를 베푸니, 왕세자 및 양녕대군~ 중추원부사 조서안. 박강 ~ 서령 한서구 등이 시립하였고, 4공신의 친자와 적장자는 인정전 외랑에서 궤향하였다. 풍악이 연주되고 무녀와 북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양녕대군은 비파를 잡고, 권공이 징을 잡았다. 이리하여 여러 공신이 차례로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2) 세조1년(1455년) 9월 20일 이증을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 계양군으로 ~ 박강을 추충좌익공신 동지중추원사 금천군으로 ~ 최유를 추충좌익공신 첨지중주원사로 삼았다

 

댓글목록

4kraphs8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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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한가람님의 조사ㆍ연구에 이어서
세양공 신도비문의 오류와 문제점에 대해 구체적인 문헌 자료의 여러 기록에 비추어
치밀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 정확하게 지적함과 동시에 실질적인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는
보기 드문 훌륭한 연구로 판단됩니다.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세양공께서는 고려 말기 또는 조선 초기에 활동하셨던
반남박씨 상대(上代)의 대표적 선조님들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세양공께서는 그저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아니라 역사에 기록된 중요 인물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양공과 관련한 기록이나 비문 등을 작성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단순 오류는 물론,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 들어가면 자칫 선조님의 명성에 누를 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允中님의 글에 서너 개의 사족(蛇足)을 붙입니다.

1. 비문 중에 "후백제의 신라 경주 침략 후 박씨들은 견훤의 탄압을 피해 여러 고을로 흩어져 살았는데 그 중 반남현을 얻어 대대로 세거하며 반남현 호장을 지내신 호장공 휘 응주께서 반남박씨 시조 이시다"라는 부분에서
①"반남현을 얻어"
②"대대로 세거하며"
③"반남현 호장을 지내신"
의 주어(主語)가 누구(또는 무엇)인지 약간의 모호함을 느낍니다.

2.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8~1367) 선생께서 문정공의 과거를 주관한 지공거(知貢擧=좌주座主/은문恩門)였으니 문정공을 익재의 문생(門生)으로 볼 수 있지만 실제로 문정공께서 "이제현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5. 出游(또는 出遊)는 한어(漢語) 사전에 "舊時指到他地做官或遊學"(옛날에 '다른 지역으로 가서 관직을 맡거나 유학을 가다'는 뜻)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고향을 떠나 타지로 공부하러 나가다>라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鄕寺'에서 공부한 다음 단계가 '유학'이 되면 매우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出游를 출세(出世)로 옮기는 것은 너무 나아간 것이 아닐까요? 고전번역원의 번역도 '유학'으로 새기고, 박찬수 박사님의 저서 『평도공 박은 연구』에서도 고전번역원의 번역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詩를 굳이 세양공의 신도비문에 넣어야 하는지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 . . . .)

13. 당혹스러운 내용입니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문헌 자료를 내세워 무언가를 기술하는 것은 자칫 '창작(創作)'(!)의 의심을 받을 수 있으며 결국 읽는 이로 하여금 다른 모든 기록에 대해서도 불신을 품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할 우려가 있습니다.

允中님의 깊이 있는 연구에 다시 한 번 더 경의를 표하며,
이 기회에 반남박씨의 종족사(宗族史) 연구가 활성화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숭조(崇祖)>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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