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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국내 최초 유화 초상 좌의정 숙헌공 박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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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07-18 13:42 조회3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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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회수 유화 초상-대전시립박물관

 navykanggu  2022. 5. 10.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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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립박물관에 전시 중인 박회수 유화초상을 보고 왔네요

박회수 유화 초상은 분홍색 시복을 입고 종 2품이상이 착용하는 학정금대를 두른 반신

초상으로 우리나라에 있는 서양인이 조선인을 그린 가장 오래된 유화 초상이라고 하네요

숙헌공 박회수는 1833~1849년까지 임금의 명을 받고 사신으로 중국 북경에 다녀왔는데

'승정원일기'에 헌종 12(1846)조에 의하면 박희수가 중국에 갔을 때 양인으로 하여금

초상 한 본을 그리게 하였는데 모두 기름을 사용하여 그렸다는 기록이 있어

1833~184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출처]박회수 유화 초상-대전시립박물관|작성자navykanggu

 

 

 

 

박희수 유화초상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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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박회수(朴晦壽)17861861응천-동선--세견-태상-필순-師任-麟源-종갑-초수

                                                                                                       종우-회수-齊承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潘南). 자는 자목(子木), 호는 호곡(壺谷) 또는 호하(壺下).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종우(宗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통덕랑(通德郎) 신명성(辛命聖)의 딸이다.

1810(순조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의릉참봉(懿陵參奉)을 지내다가, 181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조좌랑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정언이 되고, 왕의 총애를 받아 이례적으로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를 겸하기도 하였다.

1819년 병조정랑이 되고 이듬해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나갔다. 이때 잇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였다.

1823(弼善)(校理)가 되었고, 세자 익종(翼宗)이 정사를 대리할 때 신임을 받아 승지로 임명, 국사를 자문하였다.

그뒤 호조참판병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충청감사가 되었다. 감사로 재임할 때 흉년이 들자 창고를 열고 백성을 구휼하여 어사가 포상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1833년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의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이 되어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행장(行狀)시장(諡狀)의 찬집을 맡았다.

1835(헌종 1)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2년 뒤에는 평안감사가 되었다.

1840년 연공정사(年貢正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오고, 1845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1849년 헌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1851(철종 2)에는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官)을 맡았다.

1855년 임금이 파주에 갈 때 병을 핑계로 호종(扈從)하지 않아 삭직되었다가, 다시 우의정을 거쳐 1859년 좌의정에 이르러 3년여간 재직하다가 영부사(領府事)로 죽었다.

() ()()

마음이 정직하고 처사에 신중하여 왕을 잘 보필하고 백성들을 돌보아 당대에 신망이 높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무능한 관리를 제거하고 임금의 향락을 경계하였다.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박회수(朴晦壽) 純祖 10 式年 進士

본인 자치장(穉章) ?

본인생년병오(丙午) 1786

본인거주()

본인구존구경하(具慶下)

본인전력유학(幼學)

부친성명박종우(朴宗羽)

부친품계절충장군(折衝將軍)

부친관직용양위()/행부호군(行副護軍)

박회수(朴晦壽) More Info.

순조(純祖)16(1816), 별시(別試) 병과6(丙科6)

생년(生年) 1786, 병오

() 자목(子木)

본관(本貫) 반남(潘南)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 박종우(朴宗羽)

조부(祖父) 박인원(朴麟源)

증조부(曾祖父) 박사임(朴師任)

외조부(外祖父) 신명성(辛命聖)

처부(妻父) 서영보(徐榮輔)

전력(前歷) 유학(幼學)

순조24/10/15 응교 박회수(朴晦壽)

     25. 6/09 집의 박회수(朴晦壽),

     27/12/07 박회수(朴晦壽)를 공충도 관찰사로 삼았다.

     29/11/25 박회수(朴晦壽)를 이조 참판으로

     32 6/21 박회수(朴晦壽)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33 7/25 進香副使 박회수(朴晦壽),

     34 3/10 박회수(朴晦壽)를 비변사 제조로 차출하였다.

     34 9/21 박회수(朴晦壽)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박주수(朴周壽)를 좌빈객으로 삼았다.

헌종 1 6/10 박회수(朴晦壽)를 형조 판서로

       6/25 박회수(朴晦壽)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회수를 동지 정사(冬至正使),

       10/18 동지 정사(冬至正使) 박회수(朴晦壽)

     2 5/25 박회수(朴晦壽)를 형조 판서로,

     3 1/13 박회수(朴晦壽)를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4 11/19 박회수(朴晦壽)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5 8/10 박회수(朴晦壽)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6 3/04 박회수(朴晦壽)를 한성 판윤으로,

      7/21 박회수(朴晦壽)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9/10 박회수(朴晦壽)를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삼았다.

   7 4/22 박회수(朴晦壽)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11 1/11 좌참찬(左參贊) 박회수(朴晦壽)에게 상직(相職)을 제배(除拜)하라고 명하였다.

 12. .9/20 右議政 박회수(朴晦壽)가 총위영(總衛營)의 영속(營屬)의방자한 폐단을 경계하기를 청하니,

 

철종 2 1/19 박회수(朴晦壽)를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1851).

    10 5/05 판부사 박회수(朴晦壽)를 다시 상직(相職)에 제배하라고 명하였다.

       5/08 左議政 박회수가 소장(疏章)을 올려 사직(辭職)하였으나

   12 1/16 판부사(判府事) 박회수(朴晦壽)를 상직(相職)에 다시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1/21 左議政 박회수(朴晦壽)가 진소(陳疏)하여 사직(辭職)하였으니,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박희수 초상1.JPG

12 6/01 (領府事) (朴晦壽)가 졸()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전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박회수의 초상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화 작품이다. 숙헌공 박회수(肅憲公 朴晦壽, 1786-1861)1833년부터 1849년까지 무려 4차례나 지금의 중국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는 그곳에서 서양인에게 초상화를 한 점 그리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그림으로 추정되고 있다.

 

박회수의 초상은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도 1점이 소장돼 있다. 전통적인 화법의 초상화이다. 화풍의 차이도 흥미롭지만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 초상 모두 분홍색의 단령(團領)을 입고 사모(紗帽)를 쓰고 있어 비슷한 차림이지만 허리띠의 재질이 다르다. 시립박물관 초상은 노란 바탕에 붉은 무늬가 들어간 학정대(鶴頂帶)를 둘렀다. 2품이 사용할 수 있는 소금대(素金帶) 장식이다.

성균관대 초상의 박회수는 노란 바탕에 까만 점이 콕콕 박혀있는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데, 이는 1품 관리만이 착용할 수 있는 서대(犀帶) , 물소뿔 허리띠이다. 박회수는 이 그림이 그려지기 2년 전 좌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두 그림 사이에는 근 30년의 세월이 있다.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어쩐지 친근한 인상의 젊은 사신은 어느 새 자애로운 눈빛을 지닌 70대의 정승이 됐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서로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에게 해줄 이야기는 무엇일지 잠시 생각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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