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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답변 | 증직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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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호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04-22 16:02 조회432회 댓글2건

본문

참봉공후 박호우입니다.

 

지난 주에 "감정공(박응천)이 왜 좌찬성에 증직되었는가? 순천김씨는 정경부인에 증직된 것인가, 생전에 정경부인의 첩지를 받으신 건가?" 에 대해 고문서를 통해 답을 드렸는데, 몇몇 분들께서 증직(贈職)에 관련하여 아직도 풀리지 않은 궁금증이 많으신 것 같아 답변을 드립니다. 

 

오늘날에 족보나 《숭효록》, 《반양세승》, 《금천박씨세승》등을 읽을 때, 사료에 대한 비판을 우선적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혹 반양세승 의 저자가 일부러 교지 등을 누락시킨 것이 아니라면?' 이라는 생각을 하기 전에 사료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역사적 맥락을 따져보는게 우선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른바 《시경(詩經)》의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無忝爾所生)"를  범하게 되는 누(累)를 저지르는 꼴이 됩니다. 

 

이른바 증직이란, 크게 두가지 종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1) 대상자의 실직(實職, 실제 관직),  2) 노인직(老人職)으로 인해 증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국대전》의 이전(吏典), 추증(追贈)에 대한 조목을 보면, " 종친부터 문, 무관으로서 실직 2품이상을 지낸 자는 그의 3대를 추증한다. (宗親及文·武官實職二品以上, 追贈三代.)"는 조항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2품 이상의 실직인, 참판의 지위에 오른 경우, 그 대상자의 선조 3대를 추증하게 되는데,  대상자의 아버지가 관직(館職, 현직)을 거친 경우, 아버지에겐 이조참판, 조부에겐 이조참의, 증조부에겐 사복시정(좌승지를 증직한 경우도 있음)을 증직합니다. 그러나 대상자의 아버지가 관직을 하지 못한 경우, 아버지에게 호조참판, 조부에게 좌승지, 증조부에게 사복시정을 증직합니다. 

 

또한, 참판에서 판서로 승진한 경우, 그 대상자의 3대를 이조판서, 이조참판, 이조참의로 올려서 증직하고, 마찬가지로 정승로 승진한 경우, 그 3대를 좌찬성, 이조판서, 이조참판으로 올려서 증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감정공의 증직 교서에 대해 "왜 가선대부에서 가의대부를 건너뛰고(?) 자헌대부로 증직이 되었는가?"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신데, 

품계를 보기 전에 증직된 관직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피면 해석이 잘 되실 겁니다. 

다시 그 순서를 살피자면 통훈대부 사재감정에서 통정대부 '좌승지'로, 

통정대부 좌승지에서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에서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이조판서는 정2품이기 때문에 정2품의 하계인 자헌대부를 받은 것이며, 이조판서는 가의대부가 될 수 없습니다.)

자헌대부 이조판서에서 숭정대부 '좌찬성'으로  (마찬가지로 좌찬성은 종2품이기 때문에 종2품의 하계인 숭정대부를 받은 것이며, 좌찬성은 정헌대부의 품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차례대로 증직이 된 것입니다.  

 

또한, 묘도문자에 간혹 찬자(撰者,  저자)가 가족관계 등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증직 여부나 친척의 이름을 실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율곡도 간혹 실수를 했지만), 백사 이항복이 감정공을 위해 묘도문을 지으며 그 대상의 증직 여부도 살피지 않고 전달받은 행장, 유사 등만 대충 참고해서 글을 지었다는 주장은, 당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상상도 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서포공(박동선)이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훈으로 감정공은 숭정대부 좌찬성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에 증직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이유는 잠곡 김육이 잠곡유고에 도정공 박응인의 묘갈을 쓸 때, 감정공이 영의정에 증직되었다고 기술하였기 때문입니다. 호군공 박동위가 부친의 묘갈을 김육에게 부탁한 시점은 그가 장악원 첨정이었던 1646년 경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 때는 인조반정이 한참 지난 시점으로, 광해군 때 내려진 위성공신 공훈이 삭제되었을 무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김육이 영의정 운운을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1646년 이후 증직을 깎아 좌찬성으로 다시 조정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예를 들어, 1800년에 금석공 박준원이 공조참판(정2품)에 제수되자, 3대를 추증하였는데, 공주판관 박사석(부)에게 이조참판, 통덕랑 박필이(조부)에게 이조참의, 황주목사 박태원(증조부)에게 사복시정을 추증했습니다. 여기서 혹, 박준원의 조부(박필이)는 관직을 못했는데 왜 정5품의 통덕랑 품계를 받은 것인가? 라고 의문을 제기하실 분이 있을 수 있는데, 반양세승을 편차한 예조판서 박주수가 후손들을 위해 설명을 붙여놨습니다. 

 

"本朝官制有邦慶, 各加一資於有官者. 則已經準階, 資窮者代加, 其資於子, 如世䕃之例. 公承松潭公加爲通德." 라 하였는데, 현대어로 번역하자면 

본조(本朝, 우리 왕조)의 관직제도는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관직에 있는 자에게 각각 한 자급씩을 더해 준다. 이미 그 준직(準職, 당하관으로서 가장 높은 정삼품, 즉 통훈대부)의 품계를 지낸 자궁자(資窮者, 당하관의 품계가 다시 더 올라갈 자리가 없게 된 사람)는 대신하여 그 자급을  아들에게 더해줄 수 있으니, 세음(世蔭, 음직)의 규례가 이와 같다. 공은 송담공(박태원)을 승계하여 통덕랑에 가자(加資)된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족보에 통덕랑의 품계를 받았다고 명시되어 있는 여러 선조들이 이러한 예에 해당될 것입니다. 

 

노직(老職)의 경우,  《경국대전》의 노인직조(老人職條)에 "나이가 80세 이상이면 양인, 혹은 천인을 막론하고 1품계를 수여하며, 원래 품계가 있는 사람에겐 1품계를 더 수여하며, 당상관은 왕의 전지가 있어야 수여한다." 는 조목이 있으므로, 국가에 경사가 있는 경우 지방관들이 고을에 70세부터 80세 이상의 노인들의 현황을 파악하여 상위 기관으로 보고를 하는 체계가 있었습니다. 영조, 정조, 순조 연간에 노인직 증직 관련 기록이 《각사등록》등에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율통보》에 "자헌대부의 경우, 문관, 무관, 음관을 막론하고 4품의 실제관직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지사(知事, 지중추부사)에 제수할 수 없다."는 조목을 통해 국가 원로들이 소속되어 있는 '중추부(中樞府)'에 상한선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88세까지 장수하신 논산의 참봉공후 박필강(朴弼康) 선조의 경우, 본인은 80세 때 중추부의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3대가 추증되었는데, 박태흥(부)는 호조참판에, 둔촌공 박세기(조부)는 좌승지에,  증조(박휘)는 이미 둔촌공의 영국종훈(寧國從勳)으로 인해 사헌부 장령에 추증되었기 때문에 품계가 올라가지 않은 것입니다.  (장령에서 집의로 증직된 게 이때의 일 때문일지도 모름.)

 

추가) 실직을 지낸 사람이 치사(致仕, 70세 정년퇴임)한 뒤, 노직을 받은 경우, 

(여기서부터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하는데, 대상자의 아들이 시종신(侍從臣, 홍문관이나 승정원 등 왕의 지척에서 보좌하는 관료)일 경우, 추가적으로 추은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

통상적으로 관료는 70세에 치사하여 벼슬에서 물러나는데, 그 나이가 70세 때문에 그와 동시에 중추부의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혹 80세까지 생존해 있을 경우, 관례에 따라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됩니다.  예를 들어, 동추공 박환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혹 70세로 정년퇴임한 관료가 왕실의 인척인 경우, 왕실 관련 사무를 맡아보는 돈녕부(敦寧府)의 벼슬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반남박씨는 인성왕후, 의인왕후, 여러 부마들 때문에 이에 해당합니다.) 돈녕부의 도정(都正, 정3품) 동돈녕(同敦寧, 종2품)에 제수를 받은 선조로 대표적인 분으로 도정에 제수된 박태적, 동돈녕에 제수된 지추공 박사한, 동돈녕공 박사임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제 추측으로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璿源譜)에 의인왕후의 방계 친척은 5대손(동-외자-세-태-필 항렬)까지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에 수록된 사람들 중 은퇴자가 돈녕부 관직을 받는 듯 합니다.)

 

특별한 경우로, 영조는 본인이 장수하였으므로 (혹 본인이 장수하고 싶었기 때문에) 노인들을 매우 우대하였는데, 지추공 박사한의 경우, 80세에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된 뒤 85세 생일을 맞아 특별히 조정에서 쌀을 내리고, 양로연을 베풀어 주고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차남 박성원이 시종신인 승지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 듯 합니다.) 또한, 산림(山林)이거나 문과에 급제하여 당상관 이상의 실직을 지낸 경우, 판돈녕부사(박준원, 박기수, 박윤수),  지중추부사, 판중추부사(박세당) 등의 원로직에 제수된 경우도 있습니다.

 

추가) "내 선조들이 관직을 하지 못했는데 왜 첨지중추부사, 호군,  통덕랑 등의 품계를 받았다고 족보가 기술한 것일까?" 에 대해, 

수직(壽職,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거나, 음직으로 호군,  통덕랑 등의 산직(散職)을 받은 것은 녹봉을 받거나 실무에 종사하는 현직(顯職)이 아닌 명예직입니다. 그리하여 70세에 판중추부사(1품)에 제수된 서계 박세당 선조는, "내 노직으로 인하여 조정에서 (부친의) 공적을 기록해준 광영을 가려서야 되겠느냐?" 라고 하며 기뻐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직이 아니라 하여 선조들이 적법한 절차에 의해 받은 수직(壽職), 음직을 평가절하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결론으로,

1) 1825년 을유보까지의 족보 기록은 1차사료의 (혹은 2차) 역할을 굉장히 잘 수행한 기록이며, 수단하는 과정에서 철저한 고증을 거쳤기 때문에 (간혹 오탈자가 있지만) 매우 신뢰할 만한 기록이다. 

2) 교지 등의 고문서, 국가의 주도로 편찬된 사료는 굉장히 정확하여, (어떤 경우에는) 족보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 

3) 의도적으로 자신의 조상의 관직 등을 부풀려서 이득(?)을 보려는 행위는 근대에 이르러 자행된 행위이며, 마음만 먹으면 교차검증을 통해 진위여부를 가릴 수 있기 때문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 될 수 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댓글목록

4kraphs8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4kraphs8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깊은 연구에 감동하였습니다. 우리 대종중의 앞날이 매우 밝아 보입니다.

(민망하지만) 눈이 나빠 작은 글씨를 읽기 힘들어 자세히 살피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결론으로 내세우신 3가지에 대해서만 간략히 의견을 올립니다.

<1) 1825년 을유보까지의 족보 기록은 1차사료의 (혹은 2차) 역할을 굉장히 잘 수행한 기록이며, 수단하는 과정에서 철저한 고증을 거쳤기 때문에 (간혹 오탈자가 있지만) 매우 신뢰할 만한 기록이다.>

조선 시대에 간행한 세보가 갑자보 이후의 세보보다는 훨씬 신뢰도가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병술보(1766년)부터 엄격성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여 을유보(1825년)에 이르러서는
조금 더 흔들린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철저한 고증을 거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 이 게시판에서 구체적으로 거론하기는 적절치 않아서 생략합니다.)
다만, 문강공(휘 紹소) 후손들의 경우는 기록이 신뢰할 만합니다.

<2) 교지 등의 고문서, 국가의 주도로 편찬된 사료는 굉장히 정확하여, (어떤 경우에는) 족보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

동의합니다(물론 신뢰도가 100%는 아닙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사찬(私撰) 자료는 옛날 것이라도 신빙성이 낮은 것 같습니다.
위서(僞書) 같은 것들이 상당수 있어 보입니다.

<3) 의도적으로 자신의 조상의 관직 등을 부풀려서 이득(?)을 보려는 행위는 근대에 이르러 자행된 행위이며, 마음만 먹으면 교차검증을 통해 진위여부를 가릴 수 있기 때문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 될 수 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교차 검증이 안 되어 진위 여부를 가리기 힘든 경우도 많습니다.
<事必歸正사필귀정>이란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미안합니다, 이런 말 해서!!!). 특히 족보의 경우에는 <事必歸正>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족보 만들 때마다 새로운 "오류"가 점점 더 늘어나곤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쉬쉬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큰 문제가 됩니다. 세월이 흘러 세대가 바뀌면 거짓이 참으로 둔갑하게 됩니다. 결국 후손들이 그걸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대종중에 들어와 바로 잡아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깊은 연구에 대해 다시 한번 찬사를 보내며
지지와 성원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시영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시영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렇군요 저희 박사춘 할아범님 께서도 노직으로 동지중추부사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할아범님의 3대 아버님 휘 천주께선 증호조참판, 할아범님 휘 승 계서는 증좌승지, 증조부 휘 지문께서는 증군자감장에 오르셨습니다. 이 글을 보니 어느정도?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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