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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답변 | 거창신씨와 순천김씨 족보 기록 의문점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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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호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04-14 19:04 조회480회 댓글0건

본문

안녕하세요 참봉공후 박호우입니다. 

오늘 자유게시판에 게시된 '거창신씨와 순천김씨 족보 기록 의문점'이라는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위 내용에 대해 반성부원군 후손 박종서 대부님께서 직접 전화로 문의를 해주셨고,  또 마침 제가 1703년에 봉화현감으로 부임하여 거창신씨 할머니의 묘역을 개수하고, 녹봉을 털어 7두락(斗落, 마지기)의 제전(祭田)을 갖추고, (1708년 10월에) 묘표를 세우신 도정공 박태적의 11대손이 되는지라, 의리상 답변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답변을 위해 제가 인용한 사료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반양세승(潘陽世乘)》5권 26페이지, 27페이지 (청구번호 : 4657-12A ) 입니다. 

 

질문요약 : 감정공(박응천)이 좌찬성에 추증된 이유는 무엇인가? 백사 이항복이 쓴 묘갈명의 내용은 맞는 것일까?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반양세승에 수록된 증직(贈職) 관교(官敎, 교서)에 의하면, 

교지 1

만력 33년(1604년) 6월, 통훈대부 사재감정 박응천에게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을 증직함. (통훈(종3품) -> 통정(정3품))

주석 :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1등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 겸 춘추관의 편수관 박동선의 고(考,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승전(承傳, 임금의 전교)을 받들어 추증함.  

교지 2

만력 33년(1604년) 6월,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박응천에게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증직함. (통정(정3품) -> 가선(종2품))

주석 :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 겸 춘추관의 편수관 박동선의 고(考,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승전(承傳, 임금의 전교)을 받들어 추증함. 

교지 3

만력 33년(1604년) 6월,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박응천에게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증직함. (가선(종2품) -> 자헌(정2품))

주석 : 청난원종공신(淸難原從功臣) 1등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 겸 춘추관의 편수관 박동선의 고(考,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승전(承傳, 임금의 전교)을 받들어 추증함. 

교지 4

만력 42년(1614년) 6월 20일,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박응천에게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증직함. (자헌(정2품) -> 숭정(종1품))

주석 : 위성원종공신(衞聖原從功臣) 1등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 겸 춘추관의 편수관 박동선의 고(考,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승전(承傳, 임금의 전교)을 받들어 추증함. 


호성공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여 의주로 파천할 때 공을 세운 사람들이 책봉된 것이고, 선무공신은 전쟁 때 전투에서 공을 세웠거나, 물자 보급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말하며, 청난공신은 1596년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사람들이 받은 공훈이며, 위성공신은 임진왜란 때 광해군의 분조를 호종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이 받은 공훈입니다. 

(반양세승의 주석에는 청난(淸難) 원종공신이 정난(靖難) 원종공신 (1453년 계유정난의 공신) 으로 잘못 표기가 되어 있는데, 청(淸)을 정(靖)으로 표기한 오탈자로 보입니다. )

 

또한, 광해군이 폐위된 뒤, 위성공신들의 위훈(僞勳, 거짓공훈)이 삭제된 걸로 저는 알고 있는데, 감정공의 좌찬성 증직도 이 때 같이 삭제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 때 서포공(박동선)이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1등으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1625년 경 감정공이 다시 좌찬성에 추증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반양세승에 정사원종공신 관련 증직교서는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두번째 질문(백사 이항복이 쓴 묘갈명의 내용은 맞는 것일까)에 대한 답

 

묘도문자를 작성할 때, 저자의 관직, 이름 등은 글의 마지막에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문집을 간행할 때, 저자가 해당 글을 작성한 년도, 월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찌를 붙여 놓지 않은 경우, 편집하는 과정에서 해당 글의 작성시기를 편집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만일 그런 경우 수취인이 소장하고 있는 명문(銘文)이 현전한다면 그 작성시기를 상고할 수 있는데, 반양세승에도 이항복이 감정공의 묘갈명을 쓴 시기가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만력 44년(1616년) 모월 (月) 모일 (日)에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오성부원군 이항복 찬(撰, 글을 찬술함),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 김현성 서(書, 비문의 글씨를 씀), 숭정대부 행 지중추부사 김상용 전(篆, 비석의 전액을 씀)" 

참고로, 1616년은 백사 이항복이 죽기 2년 전이고, 서포공이 안동부사로 재직하고 있을 무렵입니다. 


추가) 순천김씨 할머니께서는 1610년 향년 92세로 돌아가셨는데, 생전에는 내명부 정부인의 품계를 받으셨고, 만력 42년(1614년) 6월 20일에 정경부인으로 증직되셨습니다.

 

바야흐로 다시 한번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위대함을 느끼며, 《반양세승(潘陽世乘)》을  편찬해주신 익헌공 박주수, 덕은공 박운수,  죽천공 박정양 등 선조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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