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효공 심온 의 죽음은 애석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는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의 일부로 태종의 왕이 되기 전 부터 왕으로 집권하고 상왕으로 있으면서 까지 20대 시절인 이방원 시대부터 상왕시절 까지 끝 없는 정권 쟁탈과 정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일부이다. 태종은 왕이 되기 전부터 정도전과 피붙인 방석 방번을 죽이고 왕이 되고는 세자를 싸고 도는 처남 4형재를 모두 처형하고 태종이 왕이 될수 있도록 도와준 공신들을 하나 하나 제거 하여 권력의 그늘에서 모두 쫓아내고 세종이 등극하여 상왕으로 있으며, 세종의 장인이자 영의정인 안효공 심온이 명나라 사신으로 갈 때 많은 사대부등 전송객이 도성을 뒤엎을 정도로 위세가 당다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중이 였고, 세종의 정치적 입지를 마련해 주기 위해 태종은 자신이 병권을 장악한 채 세종에게 군주 수업을 하던중 강상인과 심정(안효공의 아우)의 군권의 관한 사건의 괴수로 몰리어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척신을 멀리 하여 왕권을 강화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정책으로 이 정책의 결과로 세종은 안정된 정국을 바탕으로 하여 한글 창제, 경제 개혁 과학의 발달 등 많은 업적을 낳을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명군으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학자들이나 현대의 역사학자들 모두가 태종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태종의 처가인 민씨 형제들 이나 세종의 장인의 죽음이 개인들에게는 억울하고 안된 일이지만 임금의 외척을 멀리 하고자 하는 정책의 희생(犧牲)이 아닐수 없다.
소설이나 연속극에서는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극대화 하기 위해서 사건을 침소붕대하여 사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전개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시청을 했으면 한다
※조선일보 2006년 2월 18일에서 [이덕일 사랑] 태종과 외척들 국왕이나 왕세자의 장인을 ‘국구(國舅)’라고 하는데, 동반(東班) 정1품에 제수되는 척리(戚里)이다. 왕의 외척(外戚)을 척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한(漢)나라 때 장안(長安·서안)의 척리라는 마을에 임금의 인척(姻戚)들이 살았던 데서 기인한다. 조선의 척리는 품계는 높아도 정사(政事)에는 참여할 수 없었는데, 이런 원칙을 만든 임금이 태종이었다. 태종이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의 친동기 넷을 사형시킨 사건은 유명하다. 민무구·무질은 어린 세자(양녕대군)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로 처형했고, 무휼과 무회도 그 연장선상에서 제거한 것이다. 태종은 상왕 시절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도 제거했다. 영의정 심온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었다는 보고를 듣고 자신의 사후 세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제거한 것이다. 심온의 동생인 총제(總制) 심정이 상왕 경호 문제를 언급한 것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심온까지 연루시킨 것이다. 이 비정한 외척 제거에 대해 이익(李瀷)이 ‘성호사설’인사문에서 “민(閔)씨·심(沈)씨 두 집안이 함께 흉화(凶禍)를 당하게 되었으니, 대개 먼 장래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던 것이다”라고 긍정했듯이 역사의 평가는 냉혹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문제(漢文帝)가 처남 두광국(竇廣國)을 쓰지 않고, 외숙인 장군(將軍) 박소(薄昭)를 죽인 것을 들어 높이 평가한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6.02.17 18:51 4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