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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밀직공(密直公) 계축(癸丑) 호적(戶籍)[반남박씨족보 카페-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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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문암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03-11 08:57 조회7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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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직공(密直公) 계축(癸丑) 호적(戶籍) +4세 수秀 밀직공

 

전의(典議) 홍무(洪武) 6년, 공민왕 22년 계축년(1373) 12월 일 북부상(北部上) 오관산(五冠山) 삼리(三里) 임자년 호구준(戶口準)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으로 치사. 박수(朴秀) 나이 78세. 본(本)은 반남(潘南).

선고(先考)는 진사(進士) 양온령 동정(良醞令同正) 윤무(允茂)

조부는 급제(及第) 의(宜)

증조부는 호장(戶長) 응주(應珠)

외조부는 전중내급사 동정(殿中內給事同正) 오순공(吳順公). 본은 화순(和順).

처는 화평군부인(化平郡夫人) 김씨(金氏). 본은 광주(光州).

장인은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정(晶).

처 조부는 산원 동정(散員同正) 종(宗).

처 증조부는 대상(大相) 립(立).

처 외조부는 급제(及第) 홍석구(洪錫九) 본은 남양(南陽).

장남 상충(尙衷)은 나이 42세. 계사년에 을과(乙科) 제이명(第二名)으로 급제. 직책은 봉상대부 전리총랑 지제교 겸 성균직강(奉常大夫典理摠郎知製敎兼成均直講).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의 딸에게 장가감.

장녀는 반남군부인(潘南郡夫人) 박씨(朴氏). 남편은 중현대부 지정선군사(中顯大夫知旌善郡事) 안길상(安吉常). 본은 광주(廣州), 갑신년에 을과 제이명으로 급제.

차남 상진(尙眞)은 나이 35세. 경자년에 진사, 을사년에 을과 제삼명(第三名)으로 급제. 직책은 통정랑 기거사인 지제교 겸 성균박사(通直郎起居舍人知製敎兼成均博士)

삼남 상견(尙繭)【견(繭)을 경(褧)으로 개명】. 나이 28세 사온직장.(司醞直長)

차녀는 반남군부인(潘南郡夫人) 박씨(朴氏). 나이 19세. 남편은 선덕랑 장흥고사 겸 성균학유(宣德郎長興庫事兼成均學諭) 유백유(柳伯濡). 본은 서천(瑞川). 기유년 을과 제일명(第一名)으로 급제.

 


살피건대 종손의 관리인 집에는 평도공(平度公) 부인 주씨(周氏)가 관청에 낸 소장 초본이 있었는데 그 대의는 이렇다. 성 아래 중량포(中良浦)는 바로 시조부를 안장한 곳으로서 남편이 바로 제사를 주관하는 장손이다. 그러므로 이 묘역 골짜기 근처 40결도 공신의 예에 따라 하사 받은 땅으로 농막을 지어 지키는 이를 배치하였다. 남편이 죽은 뒤 동성 사촌 아우인 전현감(前縣監) 여해(汝諧)가 지난 을사년 봄에 그의 선비(先妣)를 묘역 끝에 장사지내고 금년 2월에 또 이미 30여 년 전에 장사지냈던 선고(先考)를 모셔다 합장하고서 재실을 남편 묘 왼쪽에 지었다고 운운하였으니 바로 세종 병오년 9월이다. 이로써 살펴보면 밀직공(密直公) 묘는 애초에 평도공 묘와 같이 중량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산군 병진년에 이곳을 그 어머니를 모신 회릉(懷陵)으로 썼기 때문에 평도공은 광주(廣州)로 이장하고 밀직공도 반드시 같이 옮겼을 것이나 실전되어 지금은 소재지를 알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후손들이 애통해 마지 않는 것이다. 혹 이로 말미암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여기에 기록해 둔다.

 

 

 

*1주일전에 어느 종인님깨서 문암의 칼럼을 읽으시고 위의 기록중, 일부

내용을 알려 주시면서 천장산 묘역 연구가 시작된 것인데, 마침 카페에

전문이 올려져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위의 기록을 문암의 눈으로 재해석 하겠습니다.

 

 

평도공 선조의 부인되시는 장흥주씨 할머니께서 당시 관청에 낸 소장 초본

내용을 소개한 기록입니다.

 

 

성 아래 중량포(천장산 아래로 해석)는 밀직공 박수 선조를 안장한 곳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밀직공 선조는 1373년에 별세하셨는데 어떤 연유로 밀직공의 묘소를

천장산 아래에 안장하게 되었는지 그 내력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평도공 선조께서 장손으로서 조부이신 밀직공의 제사를 주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데 이 묘역 골짜기 근처에 40결의

토지가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평도공께서 공신에 봉해지신 이후

하사받으신 땅으로 되어 있습니다.

 

 

평도공께서 1422년 별세하신 이후 사촌동생이 되시는 문암의 21대조가

되시는 감찰공 박여해 선조께서 모친이신 문화류씨 할머니의 묘소를

같은 묘역에 안장하신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면 족보에는 박여해 선조께서 감찰만 지내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위의 기록에는 전현감을 지내신 것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볼 때 구체적인

지역은 모르나 당시 감찰공께서 현감도 지내셨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봅니다.

 

 

또한 감찰공께서 1426년 30년전에 별세하신 것으로 알려진 판서공 박상진

선조를 모셔다가 부인이 되시는 문화류씨 할머니 묘소에 합장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판서공 선조를 간략히 소개하면 1339년생으로서 1365년 을사방

시험에서 장원 윤소종 선생에 이어서 을과 2위로 급제하십니다.

 

 

그 이후 여러 벼슬을 지내시다가 판서까지 이르셨으나 1375년 문정공

박상충 선조와 함께 유배를 가시게 되었는데, 문정공께서는 유배가시다가

별세하시고 판서공은 유배가신 이후 행방을 알 수 없었고 문암은 그동안

묘소가 실전된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 기록을 통해 판서공께서 1396년에 별세하셨으며, 어떠한 계기로

감찰공께서 부친을 별세하신지 30년이후 부인의 묘소에 합장할 수 있었는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점에

통탄스러운 심정 금할 수 없습니다.

 

 

한편 감찰공께서 부모님의 묘소를 합장하신 이후 중요한 일을 추진하시는데

구체적으로 사촌형님이 되시는 평도공 묘소 좌측편에 재실을 건립하셨다는

것인데, 현재 묘소와 함께 이 재실의 행방 역시 모른다는 점에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 해가 바로 1426년 9월이라고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후 70여년동안 가문의 묘역은 변동사항 없이 유지되고 있었는데, 청천병력

같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구체적으로 1496년 천장산 일대가 길지로 지정되어 이 곳에 안장된 선조들의

묘소가 이전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위의 기록에는 페비윤씨의 묘소를 1496년에 천장산 아래로 이전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연산군 실록에 의하면 1497년에 경기 장단에서 이전하였다고 한

것으로 볼 때 연도상의 착오가 있었다고 봅니다.

 

 

이를 정리하면 페비윤씨의 묘소가 이전되어서 선조들의 묘소를 이전한 것이

아니라 1496년 길지로 선정한 이후 국유지로 지정하고 그 이듬해에 이 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으니 선조들의 묘소가 이전될 때

평도공 묘소는 광주 고다기리(강동구 고덕동 일대)로 이전되어 1982년

재개발로 인하여 다시 문산 당동리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참으로

가슴 아프게도 밀직공과 판서공 부부의 합장 묘소는 현재 실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고다기리로 함께 이전한 이후 실전된 것인지 아니면 이전하는

과정에서 실전된 것인지 이 진실을 수백년이 지난 시점에 그 내력을 알 수

없다는 점에 혈통을 물려받은 후손으로서 송구함과 함께 통탄스러운 심정

금할 수 없습니다.

 

 

이상과 같이 장흥주씨 할머니께서 전해 주시는 기록을 바탕으로 문암의

눈으로 재해석을 하였습니다.

 

 

이미 수백년전의 일이나 실전된 묘소를 다시 찾는다는 것도 쉽지 않고

감찰공 선조께서 건립한 재실의 행방도 찾는 것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랜 세월 여러 선조들의 생애를 추적한 노하우를

최대한 발휘하여 그 진실을 규명할 수 있도록 혼과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2025년 3월 1일(토) 문 암 올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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