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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남한산성 守禦將臺 및 無忘樓 현판에 대한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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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允中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07-08 17:09 조회1,316회 댓글1건

본문

守禦將臺 無忘樓 현판에 대한 考察

반성부원군후 宗緖

 

 

남한산성에 올라가면 남문과 서문 사이, 산성 안에서 가장 높은 곳인 청량산 정상에 2층짜리 누각[그림1]이 하나 있다. 원래 이름은 서장대(西將臺)’이고, 현재는 수어장대(守禦將臺)’로 불리는데,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국가 보물 제2153호로 지정되었다. 수어장대 2층 처마 밑에 걸려있는 守禦將臺현판과 수어장대 옆 매바위에 씌어있는 守禦西臺글씨를 쓴 사람은 누구인지 살펴보고, 이와 관련하여 현장에 설치된 수어장대안내문 및 무망루안내문의 오류를 역사 기록을 참고하여 살펴보았다.

 

그림1.png

[그림1. 수어장대 전경]

  

수어장대 전면 좌측에는 남한산성 수어장대라는 안내문[그림2]이 세워져 있는데, 그 내용은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있어 본래 서장대라고 불렸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고, 수어청 우영장이 서장대에 머물며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후 영조 27(1751)에 유수 이기진이 복층으로 중건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지금의 수어장대 현판은 헌종 2(1836)에 유수 박기수가 수어장대를 중수하였는데, 그 형인 박주수가 쓴 것이다.(후략)” 라고 씌어있다. 

 

그림2.png

[그림2, 수어장대 안내문과 매바위]

 

위 안내문에 등장하는 광주유수 박기수(岐壽; 1792~1847)와 그의 형 박주수(周壽; 1787~1836)는 반남박씨 참봉공파 21세손으로 아버지는 박종보(宗輔)이며, 동생 박기수는 숙부 박종경(宗慶)에게 입양되었는데, 이들은 조선23대 왕 순조의 외조부인 박준원(準源)의 자손들이다. [그림3]반남박씨 임진보 참조

 

 

守禦將臺현판 좌측에는 작은 글씨로 歲丙申季夏下澣이라 쓰고 낙관을 찍었는데, 현판을 쓴 때가 丙申(1836) 季夏(6) 下澣(하순) 이며, 낙관에는 위쪽에 집금오대장군(執金吾大將軍)’ - 1품 숭정대부 판의금부사를 말하고, 아래쪽에 반남박주수군여지인(潘南朴周壽君與之印)’ - 반남박씨 君與인 박주수가 썼음을 말한다.

반남박씨 임진보에 따르면 박주수는 183675일에 했다고 기록되었으니, 현판의 글씨를 쓴 후 얼마 안 되어 사망하였으므로 최고의 遺作을 남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림3.png

[그림3. 참봉공파 충헌공 박준원 가계]

 

[그림2]의 오른쪽 아래 사진은 수어장대 앞마당 우측에 있는 매바위사진인데, ‘수어서대(守禦西臺)’라고 음각하고 왼쪽에 두 개의 낙관이 새겨져 있다. 

 

그림4.png

[그림4. 매바위에 음각된 수어서대 글씨와 낙관]

  

낙관에는 위쪽에 돈암재무(敦巖宰武)’ - 敦巖은 순조의 외삼촌 박종경의 이고, 宰武는 병조판서를 말하며, 아래쪽에 박종경인(朴宗慶印)’ 이라고 새겨져 있다. 전서체 글자가 마모되어 판독하기 어렵지만 예전에 수집해 놓은 탁본의 글씨를 살펴보면 알아볼 수 있는데, 박종경이 병조판서 벼슬을 하던 1809년에는 수어서대(守禦西臺)’로 불렸다는 증거가 된다. [그림5]인물정보 참조  

아쉬운 점은 매바위 앞에는 누가 글씨를 썼는지? 수어서대와 수어장대는 어떤 관계인지? 아무런 안내문도 없다는 것이다. 

 

그림5.png

 [그림5. 한국역대인물정보 ; 박종경 / 박주수 이력]

 

첫째. 그렇다면, [그림2]의 수어장대 안내문에 영조 27(1751)에 유수 이기진이 복층으로 중건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 아닌가? 영조27(1751)에는 여전히 서장대였으며, 순조9(1809)에는 수어서대로 불렸다는 것을 수어장대 바로 옆 매바위에 새겨져 있는 박종경의 守禦西臺글씨가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수어장대는 최초 인조2(1624) 건축 시에는 서장대(西將臺)’라 불렸고, 영조27(1751) 증축 시에도 서장대(西將臺)’였으며, 순조9(1809)에는 수어서대(守禦西臺)’였고, 헌종2(1836) 중수(重修) 후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국가유산청 - 국가유산포털 - ‘남한산성 수어장대페이지에 수정된 설명문이 게재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공식기록에는 守禦西臺또는 守禦將臺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西將臺라는 기록만 있으므로 조선 왕조에서는 서장대가 공식 명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아래 [그림6]은 수어장대 옆의 전각에 걸려있는 무망루(無忘樓)’ 현판인데, 원래 수어장대 2층 누각의 안쪽에 걸려있던 것을 일반인이 볼 수 있도록 수어장대 옆에 전시한 것이다. 

 

그림6.png

[그림6. 무망루 현판과 안내문]

  

현판의 아래쪽 오석(烏石)에 새겨진 무망루안내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략)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 지은 것이다.” 라고 씌어있다.

 

둘째, 과연 [그림6]의 안내문과 같이 무망루라는 이름을 영조가 지은 것은 사실일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승정원일기 영조41218일 갑오 1765乾隆(/高宗)30

運維曰, 廣州府尹尹得雨來待矣上曰, 入侍尹得雨進前上曰, 設賑幾次耶? 得雨曰, 四次矣上曰, 道臣亦來賑耶? 得雨曰, 明日發行云矣上曰, 春耕, 何如耶? 得雨曰, 姑未耕矣上曰, 西將臺, 何如耶? 得雨曰, 極爲通望宏傑矣上曰, 有樓名乎? 得雨曰, 無忘樓矣上曰, 何意耶? 得雨曰, 無忘在莒之意也上曰, 予欲一見, 圖形以入, 可也

좌부승지 정운유가 아뢰기를, “광주부윤 윤득우가 와서 대령 하였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입시하라.” 윤득우가 앞으로 나왔다.

상이 이르기를, “진휼(흉년에 관아에서 백성을 도와 줌)을 몇 차례 하였는가?”

윤득우가 아뢰기를, “네 차례입니다.”

상이 이르기를, “관찰사도 와서 진휼하였는가?”

윤득우가 아뢰기를, “내일 출발한다고 합니다.”

상이 이르기를, “봄갈이는 어떠한가?”

윤득우가 아뢰기를, “아직 경작하지 못하였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서장대(西將臺)는 어떠한가?”

윤득우가 아뢰기를, “극히 전체를 통해 바라볼 수 있고, 굉장히 훌륭합니다.”

상이 이르기를, “누각의 이름이 있는가?”

윤득우가 아뢰기를, “무망루(無忘樓)라고 합니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뜻인가?”

윤득우가 아뢰기를, “‘()에 있을 때를 잊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한번 보고 싶으니, 그림을 그려 들이도록 하라.”]

  

無忘樓라는 단어는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검색되지 않고, <승정원일기>에서는 위와 같이 原文(국문 번역은 본인 )만 한 건 검색되며한국고전종합DB에서 無忘樓를 검색하면, 두 건의 기록이 검색된다.

 

(1) 조선후기의 낙론계(洛論系) 학자 '미호 김원행'<미호집>'목곡 이공(이기진) 묘지명'이 실려 있는데, "俄除廣州府留守兼守禦使公以前旣乞休後又受任有關去就大防力辭上嚴旨促之至以軍律爲言公歎曰吾以重臣爲一身去就累君上爲過擧傷朝廷事體耶遂視事以爲是保障重地激勵將士威信幷著倉墩器械皆務爲經遠圖爲樓西將臺扁以無忘以寓在莒之戒이윽고 광주부 유수 겸 수어사에 제수되자, 공은 전에 이미 치사를 청해놓고 뒤에 다시 직임을 받는 것은 거취(去就)의 큰 예방(禮防)에 관계 된다며 힘써 사양하였다. 상이 엄한 성지(聖旨)로 재촉하며 군율(軍律)로 다스리겠다고 까지 말하자, 공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내가 중신(重臣)이 되어 내 한 몸의 거취 때문에 군상(君上)에게 누를 끼치는 과오를 저지르고 조정의 사체(事體)를 손상시킨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집무하여 이는 보장(保障)이 되는 중요한 지역이니, 장군과 병사들을 격려하여 위엄과 신의가 아울러 드러나고, 창고와 돈대(墩臺) 및 무기와 기구들은 모두 먼 훗날을 내다보고 경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하고는, 서장대에 누대를 만들어 무망루(無忘樓)’란 편액을 걸어 거()의 경계를 부여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2) 조선후기에 영의정을 역임한 '묵농 이유원'이 지은 <임하필기>"廣州府 ; 行宮仁祖二年建上闕七十二間半下闕一百五十四間肅宗三十七年增建左殿二十六間右室四間無忘樓在西將臺英宗辛未留守李箕鎭建枕戈亭在城內李曙築城時得一古閣於林藪中英宗辛未留守李箕鎭重修命名광주부(廣州府) ; 인조 2(1624)에 행궁(行宮)을 지었는데 상궐(上闕)72칸 반이고 하궐(下闕)154칸이며, 숙종(肅宗) 37(1711)에 증건(增建)하였는데 좌전(左殿)26칸이고 우실(右室)4칸이다. 그리고 무망루서장대에 있는데, 영종 신미년(1751, 영조27)에 유수 이기진(李箕鎭)이 지었다. 또 성안에는 침과정(枕戈亭)’이 있는데 이서(李曙)가 성을 쌓다가 숲 속에서 고각(古閣) 하나를 발견하였는바 영종 신미년에 유수 이기진이 이것을 중수하고 이와 같이 이름을 지은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위와 같은 기록을 살펴보면 무망루(無忘樓)’란 이름은 영조가 지은 것이 아니고, 영조27(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서장대에 2층 누각을 짓고, '무망루(無忘樓)'라는 이름을 지어 無忘樓현판을 걸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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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낙론계(洛論系) 학자 '미호 김원행'의 <미호집>에 '목곡 이공(이기진) 묘지명'이 실려있는데, " 俄除廣州府留守兼守禦使。(中略) 爲樓西將臺。扁以無忘。以寓在莒之戒。 이윽고 광주부(廣州府) 유수 겸 수어사에 제수되자, (중략) 서장대(西將臺)에 누대를 만들어 ‘무망루(無忘樓)’란 편액을 걸어 거(莒)의 경계를 부여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후기에 영의정을 역임한 '묵농 이유원'이 지은 <임하필기>에 " 無忘樓在西將臺。英宗辛未。留守李箕鎭建。枕戈亭在城內。李曙築城時。得一古閣於林藪中。英宗辛未。留守李箕鎭。重修。命名。 무망루(無忘樓)가 서장대(西將臺)에 있는데 영종 신미년(1751, 영조27)에 유수 이기진(李箕鎭)이 지었다. 또 성안에는 침과정(枕戈亭)이 있는데 이서(李曙)가 성을 쌓다가 숲 속에서 고각(古閣) 하나를 발견하였는바 영종 신미년에 유수 이기진이 이것을 중수하고 이와 같이 이름을 지은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영조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서장대에 2층 누각을 짓고, '무망루(無忘樓)'라는 이름의 현판을 걸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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