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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 족사(族史) 연구 자료: <羅州朴氏族會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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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4kraphs8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12-31 15:06 조회1,781회 댓글1건

본문

<羅州朴氏族會序 >  지은이: 金中淸


이것은 광해 6년(1614년) 11월 나주[반남]박씨 13세 서포공(휘 東善: 1562~1640)께서 경상도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부임하시고 이듬해(광해 7년: 1615년) 2월 13일 안동부 관아에서 나주박씨 족회(族會)가 개최되었는데 당시 나주박씨 외손으로 그 족회에 참석했던 김중청(金中淸)이 서포공의 요청으로 지은 서(序)이다. 이 <나주박씨족회서(羅州朴氏族會序)>는 김중청의 문집인 『구전선생문집(苟全先生文集)』 권지5에 실려 있다.


김중청(金中淸: 1566~162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 또는 구전(苟全). 할아버지는 김정헌(金廷憲)이고, 아버지는 절충첨지중추부사(折衝僉知中樞府事) 김몽호(金夢虎)이며, 어머니는 박승인(朴承仁)의 딸이다. 조목(趙穆)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1610년(광해군 2)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3년 전적(典籍)·예조좌랑·정랑을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에 문학(文學)이 되었으며, 정언(正言)으로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자 파면되었다. 1616년 신안현감(新安縣監)에 이어 1621년 승정원승지로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영남을 순행하였다. 이후 산직(散職: 권력이나 직무의 중요성과는 거리가 있는 관직)에 머물렀으며 인조반정 후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봉화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인물기사 집필자: 공원영(전 우송공업대학 교양과 부교수)(인물기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박승인(朴承仁): 판관공(휘 秉鈞)의 증손으로 소고공(휘 承任)의 형.


이 자료는 나주[반남]박씨 최초의 족보[세보]인 임오보가 1642년 경상도 영천(오늘날 경북 영주)에서 간행되기 27년 전에 이미 나주박씨 족회가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나주박씨 후예들이 평도공(휘 訔)을 사실상 중시조로 받들었으며, 족회에 외손도 참여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나주박씨 족인(族人)들이 이러한 모임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있었으므로 27년 뒤 임오보 간행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8세 판관공(휘 秉鈞) 16세손 승혁 근기


첨부: <羅州朴氏族會序> -金中淸 지음-

(출처: 『구전선생문집(苟全先生文集)』 권지5 )

나주박씨족회서-원문1-1.jpg

 

나주박씨족회서-원문1-2&3합.png

댓글목록

수락산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수락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글을  올려주셔서 잘보았습니다, 서포공파 의 자손으로 이런 역사의 소중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서포공 선조님은 (박상노)종손이 정조때 폐가를 당하여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서포공 휘,(박동선) 옛 문서등이 나오면 올려주십시오.
서포공 휘,(박동선) 11대손
박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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