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함께 춤을
페이지 정보
박찬문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1:31 조회1,750회 댓글0건본문

낙천정 4.jpg

낙천정3.jpg
왕과 함께 춤을
낙천정에서 원기를 회복한 태종이 다시 풍양궁으로 돌아왔다. 가끔 앞산과 뒷산에 사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풍양궁에 칩거했다. 설날이 돌아왔다. 대비를 먼저 보내고 처음 맞는 정월 초하루였다.
"종친의 여러 군(君)과 2품관 이하는 하례 반열에 참예하지 말라."
번거롭게 하지 말라며 태종이 엄명했지만 우르르 몰려왔다. 세종이 흰옷에 검은 사모를 쓰고 밖에서 헌수(獻壽)했다. 종친과 훈신 그리고 재상 등 58인은 모두 길복(吉服)으로 시연(侍宴)했다. 각도에서는 표(表)와 전(箋)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하례가 있은 후, 연회가 펼쳐졌다. 연회에서 비로소 풍악이 연주되었다. 국장 이후 처음이다. 세종은 머리에 꽃을 꽂지 않고 앞의 상에 꽂았다. 상보(床巾)는 검은 것을 사용했고 기물은 흑칠(黑漆)을 한 것을 썼다. 술이 돌아갈 적에 태종이 눈물을 씻으며 대소신료들에게 말했다.
"주상이 나에게 헌수할 적에는 내전으로 들어와서 헌수하더니 오늘은 그런 일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태종이 눈물을 흘렸다. 세종이 상복을 입고 마당에 거적을 깔고 헌수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태종이 즐거워하지 않으므로
좌의정 박은이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침울한 상왕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다.
여러 사람이 따라서 춤을 추었다.
세종이 부왕을 부축하여 일어섰다.
"온 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나를 이렇듯 사랑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또 하랴. 나는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다."
세종의 부축을 받고 일어 선 태종이 오랫동안 춤을 추었다. 대비를 잃은 슬픔을 잊고 온갖 시름을 놓은 듯했다.
※ 낙천정<낙천정지(樂天亭址)>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2호
시 대 : 조선 세종 1년(1419)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 673(강변현대홈타운 경내)
이곳은 조선 초 태종이 왕위를 물려주고 거처했던 곳으로, 세종 1년(1419) 2월에 상왕인 태종을 위해 지은 이궁에 딸린 정자가 있던 자리다. 정자가 세워진 곳은 주위보다 약간 높은 곳이어서 대산(臺山, 해발 42.8m)으로 불리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아서 시리미산(甑山) 또는 발산(鉢山)이라고도 하였다.
낙천정이라는 정자 이름은 세종 때 좌의정 박은朴은)이 지어 받쳤다.
세종 1년에 3월부터 9월 까지 7개월 동안 상왕인 태종이 20여회나 낙천정에 거동하였는데 그 때마다 주연이 베풀어 졌다. 이 해 8월 대마도 정벌 때에는 9도 절도(節度)의 배 227척과 군사 1만 8000명의 사열을 받기도 한 역사적인 건물이다. 태종이 세종 41년에 승하하자 세종은 이 정자를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주었다. 그 후 성종 3년(1472)에는 국립 양잠소격인 동잠실로 사용하게 되고, 인조 원년(1623)에는 채소밭으로 사용되었으며, 관운장의 영정을 모셔놓고 어사각이라 한 적도 있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