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 ★ 贈우의정 일두 정여창의 처 정경부인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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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1] 贈우의정 일두 정여창 (鄭汝昌 1450 ~ 1504)
일두 정여창은 성균관 문묘에 서배향 3위로 모셔져있는 동국18현 중의 한 분이다. 한훤당과 함께 김종직에게 배웠다.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 때에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가서 1504년에 죽었는데, 같은 해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했고, 중종반정 이후에 복권되어 1517년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당시에 살아있던 부인 완산이씨는 정경부인을 제수받았는데, 1523년 실록에 세사미의 지급여부를 논한 기록이 있다. 부인의 묘는 정여창의 묘 위쪽에 따로 모셨다.
-묘 :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산10-9 (남계서원 북북동2.9km)
1450년 경상남도 함양(咸陽)에서 출생하였다. 본관 하동(河東), 자 백욱(伯勗), 호 일두(一蠹), 시호 문헌(文獻)이다. 조선 전기 신진사림의 거두이자 영남학파의 종조로 일컫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으며,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483년(성종 14)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고 1490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소격서 참봉이 되었다. 같은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안음현감(安陰縣監)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화를 입었는데 당시 사초에 기록된 내용을 제대로 고하지 않았다고 파직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1504년에 사망한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경사에 통달하고 실천을 위한 독서를 주로 하였다.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 《진수잡저(進修雜著)》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태워 없애 그 유집(遺集) 일부가 정구(鄭逑)의 《정문헌공실기(鄭文獻公實記)》 속에 전할 뿐이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고 나주(羅州)의 경현(景賢)서원, 상주(尙州)의 도남(道南)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1570년 유희춘이 지은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두산백과 - 정여창 [鄭汝昌]
國朝寶鑑卷之十九 / 中宗朝 丁丑十二年
○秋八月。命贈金宏弼鄭汝昌。右議政。朱溪副正深源贈君旌閭。三人皆金宗直門徒。被禍於燕山甲子。至是趙光祖以爲言。
중종실록 12년(1517) 8월 6일
김굉필ㆍ정여창의 자손을 녹용하도록 전교하다
정원(政院)에 전교하였다.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은 다 어진 사람이다. 그 자손의 녹용은 다른 주죄(誅罪)된 사람의 자손의 예(例)와 같이 할 수 없으니, 각별히 녹용해야 한다. 또 관작(官爵)을 포증(褒贈)하고 처자를 존휼(存恤)하는 등의 일도 아울러 승전(承傳)을 봉행하라.”
중종실록 18년(1523년) 3월5 일
김굉필의 처자에게 계속 세사미를 주도록 하다
좌의정 남곤(南袞)이 의논드리기를,
"김굉필(金宏弼) 등 세 사람 【정성근(鄭誠謹)과 정여창(鄭汝昌)이다.】의 일은 신이 전에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중략~ 상이 남곤의 의논을 따르고, 이어 전교하기를, "김굉필 등의 처자에게 세사미를 주는 일은 대간이 여러 날 논계하였고, 저번에 경연에서 재상이 역시 미편하다고 하므로 의논한 것이다. 유학을 숭상하고 절의를 높이는 일은 과연 아뢴 바와 같다. 지금 만약 고친다면 일이 번거롭게 되고 더구나 벼슬을 준 것은 비석에 썼으니 추탈(追奪)함은 더욱 불가하다." 하였다.
세계원류(世系源流)
[출처] 일두집(一蠹集) 일두속집 제4권 / 부록(附錄)
정씨(鄭氏)는 그 선조가 하동부(河東府) 사람이다. 선생의 증왕고(曾王考) 종부시 정(宗簿寺正) 지의(之義)가 비로소 함양군(咸陽郡)에 살았다. ~중략~
육을(六乙) - 국사(國史)에는 을(乙) 자가 일(一) 자로 되어 있다. 우리 세조(世祖) 정해년(1467, 세조13)에 함길도 병마우후((咸吉道兵馬虞候)로 적신(賊臣) 이시애(李施愛)의 난리에 절의를 위하여 죽어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追贈)되었다. ~중략~
六乙 國史。乙作一。我世祖丁亥。以咸吉道虞侯。立殣於賊臣施愛亂。贈漢城府左尹。
- 여창은 바로 선생이다. 선생의 사적은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 및 〈사실대략(事實大略)〉에 실려 있다. 묘는 승안 고묘(考墓)의 왼쪽 기슭 간좌(艮坐)에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완산 이씨(完山李氏)이니, 도평군(桃平君) 이말생(李末生)의 따님이며, 정종대왕(定宗大王)의 후손이다.묘는 공의 묘 위쪽 간좌에 있다. -
汝昌。卽先生。先生事蹟。載在國朝儒先錄及事實大略。墓。昇安考墓左麓艮坐。配。貞敬夫人完山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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