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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우금치(牛金峙)와 淸日戰爭(청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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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더브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4-02 00:18 조회899회 댓글0건

본문

반남 박씨 22세 박제억 선조가 우금치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글을

읽었다. 그 숭고한 뜻을 기리며 글을 쓴다.

 

1894년 음력 9월의 우금치(牛金峙) 전투는 2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200명의 일본군에게 전멸당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1894년

음력 1월고부(현 정읍)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군

은 음력 3월 전주성을 함락시킬 정도로 기세를 올렸으나 결국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대원군과 민비로 상징되는 당시의 조정은 백성들의 불만을 백성과 협의하여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청나라에 의지하여 사태를 해결하려 하였다.

또한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함대에 의하여 개국을 강요당한 일본은 이를

통하여 세계의 흐름(제국주의 경향)에 편승하게 되었다. 일찍이 포르투갈인들

에게 조총의 제조술을 배워 조선과의 임진왜란에 사용하는 등 서양과 접촉을

시작한 일본은 천주교도에 의한 반란 사건 등으로 포르투갈이 물러간 후에

네덜란드(화란-和蘭)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때 소위 ‘최혜국 대우‘와

’외교사절의 특권‘을 배웠다. 즉 미국이 미국과 미국민이 네덜란드와 그 국민

이 갖는 것과 꼭같은 권리를 요구하였고 미국의 위협적인 포함(砲艦) 외교에

압도된 일본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혜국 대우란 조약 당사국이 이전에 들어와 있던 외국과 동등한 권리를 갖음

을 말하고 외교사절은 주재국의 법률에 지배받지 않음을 말한다.

조선의 대원군 정권이 일본의 명치유신 정부가 보내온 국서(國書)의 접수와

사신(使臣)의 접견을 거부하는데 반해 청국 정부는 1873년 일본이 청국과

동등한 국가적 권리를 갖음을 인정하였다. 이는 청나라가 1939년의 영국과의

아편전쟁, 그리고 1860년의 프랑스와의 청불전쟁에서 패배한 결과 영국과

프랑스에 허용한 권리를 일본에게도 허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청국의 일본에 태도의 변화에 둔감한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일 양국이 체결한 조약은 유사시에 한 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하면

다른 나라도 즉시 출병할 권리를 갖음을 명시하였다.

이는 1894-95년의 淸日(청일) 간의 전쟁으로 발전하였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

잘 아는 바이다.

국가의 권리와 부는 오직 자신들이 오로지 해야 한다는 귀천의식(貴賤意識),

다시 말해서 외세에게 굴복할지언정 천한 일반 백성들의 뜻을 들어 줄 수

없다는 왜곡된 생각이 참으로 한심해 보인다.

물론 국력이 약하여 조선 정부가 제대로 하였더라도 약소국이나 민족을

식민지로 삼아 자국의 부를 꾀하는 제국주의(帝國主義)의 거센 파도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지만.

 

참고로 웃지 못할 일은 당시 군함과 소총 등 무기와 화력(火力)에서 청국이

우세하였으나 당시 실권자 서태후(西太后)의 극에 달한 사치와 부정부패로

병사들이 사용할 총탄과 포탄이 부족했다는 한심하고도 엄연한 사실이다.

 

다음 글에서는 우금치와 유럽을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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