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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구한말 지식인 반남 박제경(朴齊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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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더브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3-09 18:19 조회1,093회 댓글6건

본문






조선 23대 왕 순조가 즉위한 1800년부터 24대 헌종(재위 1834-1849),

25대 철종(재위 1849-1863) 그리고 26대 고종이 즉위한 1863년까지의

조선 후기의 19세기 전반 조선의 정치를 설명하는데 ‘세도(世道)’란

용어를 처음으로 쓴 사람이 반남 박씨 22세 박제경(朴齊絅 생몰년도

미상)이다.

구한말 지식인의 본 조선의 정세와 그 뒷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저서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박제경은 “조선에서는 政權을 世道라고

하며 어떤 사람이나 집안이 그것을 가지는데, 왕이 세도의 책임을

명하면 의정(議政-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을 말함)이나

판서(判書-이, 부, 예, 병, 형, 공 6조의 장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고,

국가의 중대사와 모든 관료의 보고를 왕보다 먼저 들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나중에는 그 뜻에 걸맞게 세도(世道)정치가 세도(勢道)정치로 바뀌었다.

 

헌종의 후사를 결정하는 데서 개항(開港)에 이르기까지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구한말 한 지식인의 본 조선의 정세와 그 뒷이야기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주로 다루고 있는 인물이 대원군이고 또한 박제경 본인은 개화파(開化派)에

속했기에 대원군의 정치적 행각과 개명 문화에 대한 개화파의 고뇌를 서술한

대표적인 야사집(野史集)이라고 하겠다.

 

그는 개화파였음에도 대원군 이하응을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1864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撤廢令)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서원이 돈을 내라는 서신을 받으면 양반이나 상놈을 막론하고 유생(儒生)들

에게 ‘주머니를 쏟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혹독한 형별을 받는다.”

탐관오리인 수령, 아전, 그리고 유생들에게 시달림을 받는 일반 백성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을까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홍경래의 난이나 진주 민란

등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또한 철저한 쇄국 수구파(鎖國守舊)로 알려진 대원군도 원래는 고유의 미풍양속

을 지키면서 서양과 외국의 앞선 문명을 받아들이자는 방침을 갖고 있었는데

독일인 오페르트에 의한 부친 남연군(南延君) 묘의 도굴사건(1868) 이후 쇄국

으로 일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의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서울

수표교 부근에서 무지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박제경은 나중에 이름을 박제형(朴齊炯)으로 바꾸었는데 일본 출판사가 고의

로 그랬다고도 하고 당시 개화파로서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반남 박씨로서 박영효(朴泳孝-오창공후)와의 관계가 애매하다. 참고로

오창공파에서는 오창공후; 오창공파는 24세 항렬에 이길 승(勝) 대신 헤엄칠

영(泳)을 쓰는 경우도 있음을 족보를 보면 알 수 있다

반남 박씨 대종중 전자세보에서 검색해보니 22세 제경(齊絅)은 두 분인데

판관공파에서 참봉공파로 출계한 분은 1843년생이고 1918년 졸(卒)한 것으로

보아 아닌 것 같다. 나머지 한 분이 3세 직장공파인데 경술생으로 경술 국치일

이 1910년 8월 29일이므로 60을 빼면 1850년생이다. 이분은 졸년(卒年)의 기록

이 없고 다음 대에서 손(孫)이 끝난 것으로 되어있다. 박영효는 1861년생 1939년

졸로 나오므로 나이가 아홉 살이나 위인데 기록에는 박영효, 서광범 등의 지도를

받았다고 씌여 있다. 박제형(朴齊炯)인 분들을 다시 대종중 전자세보에서 시간을

갖고 꼼꼼히 검색해야 하겠다고 다짐해본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의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서울

수표교 부근에서 무지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박제경은 나중에 이름을 박제형(朴齊炯)으로 바꾸었는데 일본 출판사가 고의

로 그랬다고도 하고 당시 개화파로서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수구파도 나름대로 명분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세에 의지하려는 면은 부인할

수 없으나 개화파가 선진문명을 받아들여 백성 전체가 명실공히 더 잘 사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일념이었다면 그 이념과 사상이 더욱 숭고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댓글목록

더브러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더브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사합니다. 앞으로 대종중 전자족보와 조선근세정감 책 그리고 각종 자료들을
철저히 연구 분석하여 사실에 근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宗緖(倉守公后)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宗緖(倉守公后)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조선근세정감을 썼다는 박제경(생몰 미상)의 字는 而純이라고
  하며, 1884년 12월 4일~7일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하게 되자 박제경은 수표교에서
  백성들의 손에 희생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2. 임진보 참봉공파 박제경(1843~1918)의 자는 輝中이라고 하며, 비서원승 이라는 관직을
    지냈다고 합니다.
    승정원일기에 朴齊絅은 1887년 박문국주사, 1904년4.22일 비서승, 1904년4.23일 의원면직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더브러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더브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3세 직장공파의 제경(齊絅)이 아닌가 하는데 이분은 위 글에서처럼
경술(庚戌)생이므로 1850년생입니다. 이분은 졸년에 대한 기록은 없고 다음 아들대에  손절
(孫絶)이 되어 손자부터 기록이 없습니다.  박영효 금릉위보다 역시 나이가 열한 살이나 위인
데도 금릉위와 서광범 등의 지도를 받았다는 점이 의문점으로 남습니다. 또한 경위는 분명치
않으나 齊炯(제형)으로 개명한 기록이 있으므로 족보에 제형으로 되어있는 분들도 한분한분
철저히 검색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근세조선정감 책도 철저히 연구 분석하여 사실에 접근
토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내용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4kraphs8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4kraphs8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가 너무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 같아 댓글을 삭제합니다.
불편을 끼쳐 드린 듯하여 민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여전히 참봉공파의 박제경(朴齊絅)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황상 외부에 알려진 인물 정보와 실제가 다를 수 있는 인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주제를 발견하여 제시해 주신 '더브러'님께 감사합니다.
'宗緖(倉守公后)'님께도 함께 좋은 연구 결과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4kraphs8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4kraphs8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참고:
3세 직장공파의 제경(齊絅)이 경술(庚戌)생이라 한 것은 1850년 경술생이 아니라 1790년 경술생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경의 부친 형수(亨壽)가 영조정축(1757)생~순조갑신(1824)졸이므로 아들인 제경이 1850년생이 될 수가 없겠지요.

더브러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더브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네 그렇군요.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욱 주의를 기울여 연구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자료로는 규명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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