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3대 왕 순조가 즉위한 1800년부터 24대 헌종(재위 1834-1849),
25대 철종(재위 1849-1863) 그리고 26대 고종이 즉위한 1863년까지의
조선 후기의 19세기 전반 조선의 정치를 설명하는데 ‘세도(世道)’란
용어를 처음으로 쓴 사람이 반남 박씨 22세 박제경(朴齊絅 생몰년도
미상)이다.
구한말 지식인의 본 조선의 정세와 그 뒷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저서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박제경은 “조선에서는 政權을 世道라고
하며 어떤 사람이나 집안이 그것을 가지는데, 왕이 세도의 책임을
명하면 의정(議政-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을 말함)이나
판서(判書-이, 부, 예, 병, 형, 공 6조의 장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고,
국가의 중대사와 모든 관료의 보고를 왕보다 먼저 들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나중에는 그 뜻에 걸맞게 세도(世道)정치가 세도(勢道)정치로 바뀌었다.
헌종의 후사를 결정하는 데서 개항(開港)에 이르기까지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구한말 한 지식인의 본 조선의 정세와 그 뒷이야기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주로 다루고 있는 인물이 대원군이고 또한 박제경 본인은 개화파(開化派)에
속했기에 대원군의 정치적 행각과 개명 문화에 대한 개화파의 고뇌를 서술한
대표적인 야사집(野史集)이라고 하겠다.
그는 개화파였음에도 대원군 이하응을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1864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撤廢令)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서원이 돈을 내라는 서신을 받으면 양반이나 상놈을 막론하고 유생(儒生)들
에게 ‘주머니를 쏟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혹독한 형별을 받는다.”
탐관오리인 수령, 아전, 그리고 유생들에게 시달림을 받는 일반 백성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을까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홍경래의 난이나 진주 민란
등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또한 철저한 쇄국 수구파(鎖國守舊)로 알려진 대원군도 원래는 고유의 미풍양속
을 지키면서 서양과 외국의 앞선 문명을 받아들이자는 방침을 갖고 있었는데
독일인 오페르트에 의한 부친 남연군(南延君) 묘의 도굴사건(1868) 이후 쇄국
으로 일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의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서울
수표교 부근에서 무지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박제경은 나중에 이름을 박제형(朴齊炯)으로 바꾸었는데 일본 출판사가 고의
로 그랬다고도 하고 당시 개화파로서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반남 박씨로서 박영효(朴泳孝-오창공후)와의 관계가 애매하다. 참고로
오창공파에서는 오창공후; 오창공파는 24세 항렬에 이길 승(勝) 대신 헤엄칠
영(泳)을 쓰는 경우도 있음을 족보를 보면 알 수 있다
반남 박씨 대종중 전자세보에서 검색해보니 22세 제경(齊絅)은 두 분인데
판관공파에서 참봉공파로 출계한 분은 1843년생이고 1918년 졸(卒)한 것으로
보아 아닌 것 같다. 나머지 한 분이 3세 직장공파인데 경술생으로 경술 국치일
이 1910년 8월 29일이므로 60을 빼면 1850년생이다. 이분은 졸년(卒年)의 기록
이 없고 다음 대에서 손(孫)이 끝난 것으로 되어있다. 박영효는 1861년생 1939년
졸로 나오므로 나이가 아홉 살이나 위인데 기록에는 박영효, 서광범 등의 지도를
받았다고 씌여 있다. 박제형(朴齊炯)인 분들을 다시 대종중 전자세보에서 시간을
갖고 꼼꼼히 검색해야 하겠다고 다짐해본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의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서울
수표교 부근에서 무지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박제경은 나중에 이름을 박제형(朴齊炯)으로 바꾸었는데 일본 출판사가 고의
로 그랬다고도 하고 당시 개화파로서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수구파도 나름대로 명분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세에 의지하려는 면은 부인할
수 없으나 개화파가 선진문명을 받아들여 백성 전체가 명실공히 더 잘 사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일념이었다면 그 이념과 사상이 더욱 숭고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