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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潘陽二先生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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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더브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3-05 11:55 조회1,052회 댓글0건

본문

반남 현조(顯祖) 문정공(文正公) 박상충(朴尙衷)

송하남왕사곽검교영석구주(送河南王使郭檢校永錫九疇)

 

하남왕의 사자 검교 곽영석 구주를 보내며 의 시대적 배경

 

17세기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觀望(관망) 외교를 폈던 광해군(재위 1608-1623)

의 선배(?)는 단연 고려의 공민왕(재위 1351-1374)이다. 중국 한족(漢族) 무속신앙

인 백련교도의 난(홍건적의 난)의 지도자였던 주원장(朱元璋)이 몽골인을 몰아내고

명(明)나라를 건국한 해가 1368년이다.

1271년에서 1368년까지 중국을 통치하던 원나라(몽골)가 원래의 고향인 북쪽의

초원으로 쫓겨간 것이다. 그러므로 1368년부터는 북원(北元)이라고 한다.이 북원

의 초대 황제가 토곤 테무르인데 주원장은 그가 별 저항을 하지 않고 중국 통치

지역을 순순히 내줬다고 하여 원 순제(元順帝)라는 이름을 붙였다. 토곤 테무르는

혜종(惠宗)이라고 하는데 징기스칸(성길사한 成吉思汗)으로부터 시작한 원 왕조의

15대 황제이고 고려 출신의 기황후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아유시리다라 16대

소종(昭宗)이다. 몽골은 아유시리다라 재위 기간 중 일시적으로 명군을 격퇴한

적이 있는데 이때의 원나라 장군이 하남왕(河南王) 코케 테무르이다. 아유시리다라

는 몽골 초원을 통치하며 중국의 하남지역은 코케 테무르를 왕으로 봉(封)하여

통치를 맡겼다. 코케 테무르를 중국인들은 발음이 비슷한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

라고 쓴다. 그는 왕보보(王保保)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는 명군과 효율적으로

맞서고자 1366년(공민왕 15년) 곽영석(郭永錫)을 사신으로 고려에 보내 군사를

파병할 것을 요청했으니 공민왕은 완곡히 거절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고려는 날씨 등을 핑계로 하남왕의 요구를 차일피일했다는 기록이 있다.

코케 테무르는 명나라에 항복하지 않은 몽골 최후의 명장이라고 하겠다.

검교는 관직(벼슬)으로 보면 되는데 벼슬의 정원 외에 임시로 증원할 때나 실제

사무를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게 할 때, 그 벼슬 이름 앞에 붙여 이르던

말이다. 구주와 영석의 관계는 분명치 않으나 영석이 이름이고 구주는 별칭(別稱)

으로 홍범구주(洪範九疇)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홍범구주는 중국의 전설시대의 하(夏)나라의 우(禹)임금의 정치 도덕의 아홉 원칙

이므로 곽영석의 뜻과 명나라에 대한 전략을 칭송하는 뜻이 아닐까 한다.

참고로 중국에서 하남 하북을 나눌 때의 기준은 황하(黃河)이고 강북 강남을 나눌

때의 기준은 장강(長江)이라고 하는 양자강(揚子江)이다.

 

몽고가 쇠퇴하게 된 원인은 쌀값의 폭등에 있다고 한다. 졸지에 무려 2.500배가

뛰었다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도 미군정 당시 1946년

쌀값의 폭등이 대구 폭동의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때문에

“미국을 믿지 마라. 일본은 다시 일어난다”를 믿는 친일 성향의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또한 당시 위조지폐 사건으로 위기에 괴멸 직전에 있던 좌익들이 발악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민심도 생각해서 쌀값 등의 물가를 통제했던 반면 미군정은

시장의 자율에 맡기는 자본주의의시장경제정책을 썼기 때문에 쌀값이 폭등한 것이다.

이다. 본의 아니게 민심의 동요와 좌익이 준동하기 쉬운 상황이 되었다고 하겠다.

한편 몽골 북원 왕조는 1636년까지 존속하다 청나라에게 흡수된다.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은 물론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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