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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역사사(북한편) 박상충의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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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종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11-25 12:06 조회1,56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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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역사사 (북한에서 해설분 일부)

(박상충의 상소문)

박상충(朴尙衷)高麗 문화시중

박상충의 자는 성부인데, 라주 반남현 사람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여러 번 승진하여 례조 정랑으로 임명 되었다. 모든 제향에 관한 일을 례의사가 모두 맡아 보았는데, 종전에 문무가 없어서 루차 착오를 초래하엿으나, 박 상충은 옛날의 례의를 참작하여 그 순서 데로 분석 종합하여 몸소 필사해 두고, 제사 지내는 규례로 하였던바 그것이 후임자들에게 의거할 좋은 자료로 되었다. 그는 어머니 몽상 중에 전교령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사대부들이 부모 몽상을 100일 간 입고, 곧 벗었는데, 박 상충3년 간의 몽상을 끝내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서 드디어 취임하였다. 그러나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3년 상을 마쳤다. 신우 초년에 김 의(金義)가 명 나라 사신을 죽이고, 북원(北元)으로 달려 갔다. 김 의를 따라 갔던 자들이 돌아 오자 리 인임(李 仁任) 안사기(安 師琦)등을 후하게 대우해 주었다. 박 상충은 임금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김 의가 사신을 죽인 죄를 응당 추궁해야 할터인데, 제상들이 그 중범자들을 아주 후하게 대우해 준 것은 안 사기김 의를 사촉하여 사신을 죽인 그 증거가 나타난 것으로 됩니다. 곧 그 죄를 밝히지 않으면 나라의 재앙은 지금부터 시작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후는 그 글을 도당에 회부하여 안 사기의 목을 시가에서 베게 하였다. 리 인임 등은 또 종친 원로 백관들과 련명하여 글을 써서 북원에 중서성에 보내려고 하는데 다만 박 상충과 임박 정 도전 등만 돌아 가신 왕께서 명 나라와 국교를 맺기로 결정하였으니, 지금은 북원과 국교를 계속 해서는 안된다라고 하면서 서명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판전교 시사로 임명되었다. 북원의 사신이 오니 박 상충은 또 글을 올려 이를 거절할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저는 다년 간 시종의 직책에 있습니다. 시종으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옛날부터의 제도입니다. 근래 말하여야 할 일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감히 말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어찌 자기 직책이 간관이 아니라고 해서 남의 직책을 침범하는 것을 념려하겠으며 어찌 명예를 구한다는 것을 꺼리고 침묵을 지키겠습니까. 지금 언론의 길이 크게 열리여 재상과 백관들이 다 말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민에게 편리한 시책을 듣고져 하는 것입니다. 미욱한 저의 생각에 의하면 인민에게 편리한 시책은 많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대세가 안정되어 있지 못 하면 비록 인민에게 편리를 도모해 주려하여도 그것 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의 정세는 마치 불을 장작더미 아래에 두고 그 위에서 자면서 불이 아직 타 오르지 평안하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누가 여기에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선왕이 돌아가신 직후에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고 나라 사신은 아직 우리 국경 내에 있는데 갑자기 북원과 교통할 의논을 일으키여 민심을 현옥해 한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거짓말을 퍼뜨려 정료 군인 (定遼軍人)들로 하여금 사신을 맞이하려 하는 자를 도망치게 하고는 모르는 체 한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선왕의 명령에 의하여 사신을 호송한 자는 김 의뿐 아닙니다. 대신으로서 선왕의 명령을 받고 안주까지 갔다가 제 맘 대로 돌아 온 자는 누구입니까. 서북군으로써 정료위를 치려고 한자가 누구입니까. 김 의의 편지를 찌어서 증거를 소멸시키고 소위 사람을 함부로 죽이여 사건을 발생시킨 자와 역적 모당(母黨)을 그 대로 내버려 두고 추궁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김 의가 배반하여 달아 난지 한달이 넘는데 명 나라 정부에 알리려고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최 원(崔 源)이 사신으로 간 것은 과연 다 대신들의 의견에 의한 것인지요. 지금 듯건대 북원의 사신으로 김 의와 함께 배반하고 따라 갔던 자가 왔다고 합니다. 반역자가 자진해 돌아 와서 자기가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나라에서 추궁하지 않습니까? 그런즉 김 의가 반역한 것은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시킨 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급 존망의 관건입니다. 정세가 이러하니 비록 바보 같은 자라도 그 리해와 시비가 어디 있는 것 쯤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간관들은 조금도 이점에 언급하지 않는 것은 화를 당 할가 봐서 아주 겁을 먹기 때문입니다. 리치로 따지면 옳은 편을 따르면 그 결과가 좋고 그른 편을 따르면 그 결과가 나쁜 것입니다. 정세로 따지면 남쪽 명 나라가 강하고 북쪽 원 나라가 약한 것은 사람들이 다아는 바입니다. 대체로 신의를 버리고 역도를 따르는 것은 천하의 불의(不義) 입니다. 강한 자를 배반하고 약한 자를 따르는 것은 오늘의 그릇된 절책입니다. 신하로서 선왕의 큰 나라와 국교를 체결하자는 뜻을 위반하며 지어 명 나라 임금의 사신을 죽이고 그의 말을 빼앗는 것은 아주 큰 죄입니다. 한 두 대신이 충성치 못한 마음을 품고, 나라를 팔아 사리사욕을 채울것을 획책하며 자기의 죄악을 국가에 전가시키려 하고,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하며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후에 그만 두려고 한 것이니, 어찌 통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23 명의 충직한 대신들과 함께 진작 이것을 분간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어떻게 되며 인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욱이 리익에 달라붙고 소해를 피하고 삶을 좋아 하고 죽기를 실어하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심정입니다. 제가 어찌 미친 병자이겠습니까. 지금 예측 할 수 없는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말하는 것은 충분(忠憤)에 격동되여 위해가 닥처 올 것을 고려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이 하물며 요행이 명예를 구하며 타인의 직분을 침범하려 하겠습니까. 만약 전하께서 저의 말을 자세히 살펴 보시고 이것을 처리하여 나라를 태평케 하고 민생을 영원히 안정시키게 된다면 저 한몸은 만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다시 글을 올려 말하기를 작은 나라가 큰나라와 국교를 유지함에 있어서 큰 과오가 없다면 그것이 무던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변명 할 수 없는 큰 과오가 네 가지가 있습니다. 미욱한 저도 알 수 있는데 대신들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추궁을 받을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생겨서 의리를 돌아 보지 않게 되는 경우에 우환을 피할 만 한 길이라면 못 할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그 사람은 제 량심을 잃어 버리게 되니 비록 남보다 나은 지혜가 있더라도 도리어 미욱한 자의 견식만 못 합니다. 저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폭로하고 그것을 모면하려고 한 그들의 술책을 진술케 하기 바랍니다. 즉 가까스로 순종하여 나라와 국교를 맺자고 한 것은 선왕의 뜻입니다. 그런데 선왕이 돌아가시던 날에 드디여 북원과 련락하자는 의논을 제창하였습니다. 신하로서 임금의 뜻을 위반하고 전하로 하여금 명 나라와 틀리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첫째번의 죄입니다.

오 계남(吳 季南)이 북방을 지킬때에 함부로 정료의 사람들을 죽이고 거짓 말을 꾸며서 그 군대를 놀라게 하고 자기의 죄과를 은페하기 위하여 악당과 한패가 되여 화를 초래한 결과 국가를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둘째번의 죄입니다. 김 의가 사신을 죽이고 명 나라에 보내는 말을 빼앗고 배반하여 달아난 것은 천하의 큰 죄악이니 사람마다 그를 죽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김 의와 같이 달아났던 자가 돌아왔는데 곧 추궁하지 않고, 그 죄가 국가에 미치도록 합니다, 비록 나라가 망하고 인민이 도탄에 빠지게 되어도 보살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의 세번째 죄입니다.

김 의가 달아 난 후 한달이 지나도 명 나라에 알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최 원이 길을 떠나는데 감히 임금의 명을 위반하고 그가 국경을 나가지 못하게 하여 한달 이상 머물게 하므로써 명 나라에서는 더욱 의심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네번째 죄입니다. 이 네가지 죄 중에서 한가지 죄만 지여도 죽여야 마땅한데 하물며 이 네가지 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처단하지 않아 같이 그 화를 입히려고 하니 이것을 무슨 까닭입니까. 전하께서 과연 능히 충직한 대신들과 의논하여 이것을 밝히면 그 죄가에 대한 책임을 질자를 찾아 낼 것입니다. 그 죄인을 찾아 내게 되면 가두어 두고 대신으로 하여금 명 나라 임금에게 통보하여 그의 회답을 기다릴 것이니 그는 총명한지라 사건에 대한 시비를 분변하지 못 할 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국가와 인민이 편안 함과 위태함이 일거에 달려 있습니다. 이번 시기를 놓치면 아무리 후회 하여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간관 리 첨, 전 백염도 역시 임금에게 글을 올려 리 인임의 죄를 논한 바 리 첨등을 투옥하여 문초하였다. 이들의 공술로써 박 상충도 이 사건에 관련 되여 투옥 되었다가 장()을 처서 귀양을 보냈는데, 박 상충은 귀양 가는 도중에서 죽었다. 나이 44 세였다

그의 성격운 침목하여 말이 적고 강개하고 큰 뜻을 품었다. 정서와 력서에 박식 하였고, 글 을 잘 지었고, 한가할 때에는 책만보고 있었으며, 살림 살이에 대한 말을 입밖에 내어 본적이 없었다. 겸하여 점을 잘 첬는데, 남의 길흉에 대하여 맞을 때가 많았다. 그는 집에서 부모에게 효성하고 형제들 사이에 화목하였으며 벼슬에 있으면서 근면 근신 하였으며, 량심이 없는 자가 아무리 부귀한다 하더라도 못 보는 체 하였다. 그는 일찌기 대언 림 박에게 이런시를 지어 보냈다.

충신, 의사의 집안은 대대로 전하여 내려오고

종사(宗社)와 인민은 5

댓글목록

더브러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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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강대국과의 외교에 있어서 약소국의 처신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당시 고려의
대륙정세에 입각한 공민왕의 친명정책에 고루한 이인임등의 구신들은 여전히 친원정책을 주장하였을 것이고 병자호란 때의 인조도 현명한 광해군의 명과 청 사이에서의 중립, 실리 외교에 반하여, 대륙의 정세를 읽지 못하고 친명으로 일관하여 국격을 파탄시키고 백성을 더욱 피폐하게 하였습니다. 평도공의 부친인 문정공께서는 청렴, 강직하셨을 뿐만 아니라 대륙의 정세를 내다보는
빛나는 혜안을 가지고 계셨음은 우리 후손들의 자랑입니다.

chanseo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chanseo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박상충(朴尙衷)편 高麗 문화시중>

이라는 부분이 보이는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문화시중>이 아니라 <문하시중(門下侍中)>인가요?
그래도 여전히
문정공과 <문화시중>(또는 <문하시중>)이 무슨 관계인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문정공께서 <문화시중>(또는 <문하시중>)이라는 벼슬을 지내셨다는 뜻일까요?
북한 자료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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