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향(秋香)의 수낭사(繡囊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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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서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1:09 조회1,790회 댓글0건본문
어미가 젖먹이 자식을 못 잊는 그리움의 애틋한 마음을 담긴 사(詞)를 소개합니다.
다음의 수낭사(繡囊詞)는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화동옥삼편(華東玉糝編)에 담겨 있습니다.
추향(秋香)의 수낭사(繡囊詞)
박시수(朴蓍壽)의 소실(小室)인 추향(秋香)은 북쪽 지방(관북, 함경도) 사람인데, 그녀의 어머니가 늙었기 때문에 아기를 놓아두고 가버렸다. 이듬해에 그녀는 아기의 옷을 부쳐왔는데 ‘주머니에 수를 놓은 사[繡囊詞]’ 한 결(闋)이 있었다. 주머니의 표면에 수를 놓았는데, 그 사에서 이르기를,
綠漢緞朱黃絲 / 푸른 중국 비단에 주황색 실로 수놓으니
寸寸回腸縷縷縈思 / 마디마다 애간장이 타고 실올마다 그리움이 휘감긴다.
添將燭下淚 / 촛불 아래 눈물을 보태가며
繡與斑衣兒 / 주머니에 수를 놓아 때때옷 입고 재롱부릴 아기에게 보내노라.
하였다.
참으로 절창이다.
내가 관북(關北)에서 노닐 때 그녀의 아들 제길(齊吉)이 그 어머니를 찾으러 왔다가 여비가 없어 머뭇거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를 몹시 딱하게 여기고 여비를 보태 주었다.
제길은 18세에 무과(武科)에 합격하였는데 그 아버지 박시수(朴蓍壽)가 등과한 나이였다.
그의 적모(嫡母, 豊壤趙氏)가 제길(霽吉)이 어사화(御史花)를 꽂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크게 통곡하면서, “남편의 창명(唱名)하던 날의 모습과 똑같구나.” 하였다.
내가 함주(咸州)에 있을 때 이 일이 갑자기 떠올라서 후하게 도와주었다.
※ 諱 제길(霽吉)은 남일공 諱 응남(應男)의 10대손이고,
여기서의 ‘나’는 경주이씨 영의정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으로, 효문공(孝文公) 諱 기수(綺壽)의 생질(甥姪)입니다.
21세 휘 朴蓍壽(박시수)1767--1834 應南--東燾--垓--世冕--태정--弼明--師洙-萬源-相漢-蓍壽
《박시수(朴蓍壽) / 正祖 07 增廣 進士 》
【합격등위】 1등 0004
【본인 자】 성용(聖用)
【본인생년】 정해(丁亥) 1767
【본인거주】 경(京)
【본인구존】 영감하(永感下)
【본인문과】 갑진(甲辰) 1784 정(庭) *
【본인전력】 유학(幼學)
【본인과목】 이시(二詩)
【부친성명】 朴相漢【부친품계】 통덕랑(通德郞)=
정조(正祖)8년(1784년), 정시(庭試) 을과1(乙科1)
생년(生年) 1767년, 정해
자(字) 성용(聖用)
거주지(居住地) 경(京)
부(父) 박상한(朴相漢)
조부(祖父) 박만원(朴萬源)
증조부(曾祖父) 박사수(朴師洙)
외조부(外祖父) 서명응(徐命膺)
처부(妻父) 조시위(趙時偉)
전력(前歷) 진사(進士)
관 가선대부 예조참판
묘 시흥군 과천면 화락동(우면산 南)
(조선왕조시록)
정조10 10/13 한림의 권점(圈點)을 행하였다. 5점을 맞은 사람은 박시수(朴蓍壽) 이었다.
12 1/20 정자(正字) 박시수(朴蓍壽). 시수는 고 봉조하(奉朝賀) 서명응(徐命膺)의 외손이다.
정조18 12/22 박시수(朴蓍壽)를 사헌부 지평으로
정조 12년( 1788 1월 22일) 박시수를 운각에 두게 하다
상이 전교하기를,
“등과한 처음부터 이미 저의 등과가 거의 불행이 될 줄 알았다. 학문과 지식이 너무 성취되지 않았고 행동거지가 어린이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문계(問啓)에 대답한 계사를 보건대 더욱 해괴하다. 명색이 괴원의 정자로서 공당(公堂)에 앉아 동료를 향해 이런 망언(妄言)을 하였으니 수치를 끼친 바가 크다. 엄히 치죄해야 마땅하겠으나 근래에 일이 많기 때문에 그냥 두고 있다. 박시수를 개정해 운각(芸閣)에 예속시켜 몇 년을 한정해 관직에 의차(擬差)하지 말고 그로 하여금 독서하게 하여 성인(成人)이 되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순조9 1/30 홍문록(弘文錄)을 행하였는데,【부제거(副提擧) (李存秀), 부응교(副應敎) 김노응(金魯應), 부리(副校理)
박종신(朴宗臣) 】 3점(點)을 얻은 사람은 박시수(朴蓍壽) 박주수(朴周壽)․이다.
순조12 9/13 도당록(都堂錄)을 행하였다.【영의정 김재찬, 좌의정 한용귀, 우참찬 김계락, 홍문제학 박종경,이다.】
4점(點)을 받은 사람은 박시수(朴蓍壽)․
순조13 4/15 부안 현감(扶安縣監) 박시수(朴蓍壽),
순조16 3/14 .배종 승지(陪從承旨) 박시수(朴蓍壽) 품계를 올려 주고,
박종경은 숭록(崇祿)의 품계로 올려 주고,
박시수․ 통정(通政)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순조22 9/30 영흥 전 부사(永興前府使) 박시수(朴蓍壽), ,
순조25 1/16 박시수(朴蓍壽)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순조25 7/18 박시수(朴蓍壽)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순조31 8/6 박시수(朴蓍壽)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조선왕조실록)
정조10 10/13 한림의 권점(圈點)을 행하였다. 5점을 맞은 사람은 박시수(朴蓍壽) 이었다.
12 1/20 정자(正字) 박시수(朴蓍壽). 시수는 고 봉조하(奉朝賀) 서명응(徐命膺)의 외손이다.
정조18 12/22 박시수(朴蓍壽)를 사헌부 지평으로
정조 12년( 1788 1월 22일) 박시수를 운각에 두게 하다
상이 전교하기를,
“등과한 처음부터 이미 저의 등과가 거의 불행이 될 줄 알았다. 학문과 지식이 너무 성취되지 않았고 행동거지가 어린이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문계(問啓)에 대답한 계사를 보건대 더욱 해괴하다. 명색이 괴원의 정자로서 공당(公堂)에 앉아 동료를 향해 이런 망언(妄言)을 하였으니 수치를 끼친 바가 크다. 엄히 치죄해야 마땅하겠으나 근래에 일이 많기 때문에 그냥 두고 있다. 박시수를 개정해 운각(芸閣)에 예속시켜 몇 년을 한정해 관직에 의차(擬差)하지 말고 그로 하여금 독서하게 하여 성인(成人)이 되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순조9 1/30 홍문록(弘文錄)을 행하였는데,【부제거(副提擧) (李存秀), 부응교(副應敎) 김노응(金魯應), 부리(副校理) 박종신(朴宗臣) 】 3점(點)을 얻은 사람은 박시수(朴蓍壽) 박주수(朴周壽)․이다.
순조12 9/13 도당록(都堂錄)을 행하였다.【영의정 김재찬, 좌의정 한용귀, 우참찬 김계락, 홍문제학 박종경,이다.】 4점(點)을 받은 사람은 박시수(朴蓍壽)․
순조13 4/15 부안 현감(扶安縣監) 박시수(朴蓍壽),
순조16 3/14 .배종 승지(陪從承旨) 박시수(朴蓍壽) 품계를 올려 주고,
박종경은 숭록(崇祿)의 품계로 올려 주고,
박시수․ 통정(通政)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순조22 9/30 영흥 전 부사(永興前府使) 박시수(朴蓍壽), ,
순조25 1/16 박시수(朴蓍壽)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순조25 7/18 박시수(朴蓍壽)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순조31 8/6 박시수(朴蓍壽)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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