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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도유사 금양위 휘미 조선중기에 한문문장에 4대 대가 택당 이식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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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0:12 조회1,8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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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양위(錦陽尉)에 대한 만사 2수


기름지고 화려한 자리 안중(眼中)에 없이 / 脫略膏華地
필묵 들고 문단에서 소요(逍遙)하신 분 / 婆娑翰墨場
뛰어나게 맑은 자질 일찍부터 아꼈나니 / 早知憐俊爽
꺾인 가지를 그 누가 나보다 슬퍼하였으랴 / 誰更惜摧傷
술에 대취한 채 영욕을 모두 잊고 / 熟醉忘榮辱
높이 노래 부르면서 세상의 비평도 사양했지 / 高吟謝否臧
그저 은택표에 응할 따름이었으니 / 唯應恩澤表
두 당양에 비교해도 부끄러움 없으리라 / 不愧杜當陽


이(二)
어지러운 세상 속에 오복을 온전히 누리리요 / 亂世無全福
이름난 가문 역시 온갖 곤경을 겪었도다 / 名家亦不長
타고난 귀골(貴骨)도 궁하게 만드는 시인의 운명 / 詩應窮貴相
튼튼했던 육신 역시 술이 그르쳐 놓았도다 / 酒却誤剛腸
앞서거니 뒤서거니 쌍벽이 묻힌 지금 / 次第埋雙璧
처량해라 한집안이 굳게 문이 닫혔구나 / 凄涼閉一堂
허전하게 홀로 남은 옛날의 빈객 / 空餘舊賓客
일백 꽃 핀 뜨락에서 눈물을 뿌리노라 / 濺淚百花傍


[주C-001]금양위(錦陽尉) : 선조(宣祖)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결혼한 박미(朴瀰)의 봉호(封號)이다.
[주D-001]꺾인 …… 슬퍼하였으랴 : 박미의 부친인 박동량(朴東亮)이 국구(國舅)인 김제남(金悌南)과 친분이 깊다는 이유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화(禍)를 입은 데다, 자신도 폐모론을 주도하는 정청(政廳)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김류(金瑬) 등과 함께 10사(邪)로 불리워지면서 관작을 삭탈당했던 때의 일을 말한 것이다.
[주D-002]그저 …… 없으리라 : 박미가 단지 부마(駙馬)라는 화려한 이름만 지녔을 뿐, 실제 생활은 그지없이 검소하기만 했다는 말이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그의 비문(碑文)에 의하면, 그의 자손들이 기한(飢寒)을 면치 못했다고 하는데, 그가 죽고 난 뒤 청상(靑孀)이 된 옹주(翁主)의 가난한 살림을 걱정하여 효종(孝宗)이 그의 아들인 세교(世橋)를 특별히 군수로 임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은택표(恩澤表)는 《한서(漢書)》에 나오는 ‘외척은택후표(外戚恩澤侯表)’의 준말로, 국구(國舅)나 부마(駙馬) 등을 가리키는 말로 보통 쓰인다. 두 당양은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진 진(晉) 나라 두예(杜預)를 가리킨다. 그 역시 문제(文帝)의 누이동생인 고륙공주(高陸公主)와 결혼했는데, 청빈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유명(遺命)을 남긴 내용이 《진서(晉書)》 권34에 나온다.
[주D-003]앞서거니 …… 지금 : 박미의 아우인 박의(朴漪)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여러 선현에 문집을 보니 금양위 대한만사 제문을 보고 참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선조에 5째딸 인빈소생 옹주와 결혼하여 부귀영화를 누릴수 있엇으나
생활은 검소하고 기한을 면치못했다고 하고 심지어 집에 있는 노비들마져 바보들만
두었다고 합니다.
노비들이 금양위를 사칭해 이권에 개입하는 종들이 있었기에 바보들만 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안에서는 조금 모자라는 사람을 보면 금양위집 종같다고 했답니 다.



장모 인빈김씨는 선조에 총애를 한몸에 받아 여러왕자 여러옹주를 출생햇고 이인왕후
박씨에 소생이 없음을 항상 송구스럽게 생각 했다고 합니다.

부마가 되면은 높은 관직을 포기 해야하고 종친부에 속해 부귀 영화를 누렸으면
했으나 그것마져 포기하고 추위와 굶주림을 면치 못했다고 하니 존경스럽고 머리가
숙여지며 여러번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동양위 신익성과 금양위는 모두가 국가에 동량이며 정승에 제목이 부마가 됨으로써
모두가 안타깝게 생각했으며 광해군 때에는 인목대비 폐비를 논한자리에 참석하지
아니하였다고 김유 오창공 부자가 십사를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술이 대취해서
모든 영욕을 잊고 정치 비평도 사양했다고 합니다.

광해군때 부친 오창공은 국구 김제남과 친하다고 형 남곽공과 귀양 갔으며 서포공은
세상을 피해 광주 땅 광나루로 피신해서 농사를 짓고 세상에 뜻을 잊고 살았다고
합니다. 조금만 광해군 집권세력에 협력했으면 부귀영화를 누릴수 있었을 텐데
옳치못한 일에는 부귀영화도 뜬구름 같이 생각했다고 합니다.

광해군은 초기에 한때 외교 실리 정치는 인정하나 동복형 임해군은 죽이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죽림칠현 사건을 조작해서 국구 김제남을 죽이고 계모지만은 모친인
인목대비를 폐비 시켜 서궁에 유폐한 패륜은 정치를 잘했다고 하나 누가 뭐래든
나는 좋은 임금이라고 나는 동의 할수 없으며 그당시 인조반정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조반정후 정묘호란 병자호란 국난을 겪었으나 명나라가 우리나라 임진왜란 7년환란
돕다가 국력을 소모해 나라를 지탱키 어려울때 만주족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워
우리나라에게 명나라를 돕는다고 트집잡아 침략해 우리나라를 협박해 왕이
병자호란때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한것은 모두가 잘못을 광해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박문에 약창공이 광해군이 사촌동서라고 휘생된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당시 약창공께서는 막강한 병력으로 역성혁명도 할수있었으나 혁명세력에 순순히
체포되어 처형당했으니 이또한 충신에 사표입니다.

반남선생 기개 평도공에 청렴 야천선생에 정학 졸현공 오창공에충성 오창공은가까운 조카도 몇번
타일러 말을 듣지 아니하면은 관직에서 봉고 파직 하셨다고 합니다.


오창공 현석 금양위 연암 환제 박규수 금릉위 박영효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
반남박문에 정승을 3명;이나 배출시킨 최고 문벌임을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가문에서
종중 싸이트에 잠깐 뜨다 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시비가 있으면은 분명 흑과 백이
있는법 잘못한 점이 있더래도 포용하시고 소외 시키지 마시고 화목하십시요

충효 우의는 3대 덕목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특히 화목하지 못한 가문이나 가정은
지도자가 되면 파벌을 만들어 서로 반목하게 만든답니다. 종중에 대사 족보를 만드는것도 종족이 서로 화목하기 위한 그이유중에 하나입니다.

영주에서 첨추공과 저의 선조 육우당이 의논해서 금양위를 초대 도유사로 추천하시고
처음 우리 종중이 문을 열고 족보를 하시고 금양위댁을 방문하셔서 처음 족보 발문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나도근래에 선조들에 마음을 이해할것 같습니다.


전통있는 가문 훌륭한 조상에 명덕을 생각해서 조상에 누가 되지 않도록 그선조에
그자손이라 칭송 받도록 하시고 조상못지 않는 훌륭한 자손이 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종중에 대사인 족보를 위해 모두 힘을모아 협조합시다. 주제넘게
서툰문장으로 글을씀을 용서하시고 끝을 맺습니다.

                                                 인천우거에서 박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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