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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3-03 22:03 조회2,138회 댓글0건

본문

  좋은 글을 올려 주심 감사합니다.
내용중에 몇가지 다른 의견이 있어 글을 올립니다.

  朴尙衷牧隱 李穡의 문인으로
문정공 박상충은 공민왕213525월의 과거에서 22세의 어린나이로 을과 제2(榜眼: 次席)으로 급제하였고 이 때의 장원은 26세인 손위 처남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였으니 목은과는 동방급제(同榜及第)로 문정공이 목은의 문인이라는 것은 후대에 잘못 전해진 기록 때문이다.

李穡에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목은 선생이 성균관 대사성 일 때 문정공은 학관으로서 서로 성리학에 대하여 토론은 하였으나 목은의 문하에서 수학한 일은 없다.

목은 이선생이 대사성을 겸하여 수장이 되었고 선생과 정포은선생,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정재(貞齋) 박의중(朴宜中),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등 제공(諸公)이 다 관속이 되었다. 매일 명륜당에 앉아 경전을 나누어 수업하고 강학을 마치면 서로 함께 의심스러운 곳을 논란하고 변석하고 절충하여 반드시 정주(程朱)의 뜻에 부합하기를 힘썼다.


  박상충의 영전에 치제하는 한편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정공의 영의정 추증은 아드님이신 평도공 박은(朴訔)께서 좌의정이였기 때문이다

  태종 16년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겸 영경연사 금성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兼領經筵事錦城府院君)에 추증되다.

아들 평도공이 재상에 임명된 뒤 은혜가 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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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숙종35)에는 潘南二先生遺稿를 간행하여

1708(숙종34)에 전라도 관찰사, 전주부윤이신 박필명선조께서 간행하심

 


19세에 문과에 장원한

창왕 1(1388) 10월에 밀직제학 정도전과 지신사 권근이 주관한 전시에서 병과 2인으로 급제하여 문과에 장원이 아님

 


朴訔에 이은 두 번째 장원합격이었

문강공은 반남박씨에서 첫 번째 장원급제 (문과에서는 급제라하고 사마시에서는 합격이라고 한다)

 


사림에서는 공로가 인정되어 領議政追贈되고 文康諡號가 내렸다.

문강공이 영의정에 추증된 것은 사림의 공로가 아니고 두째 아드님이신 반성부원군 때문에 영의정에 추증되심.

공 및 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뒤에 반성 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으로 인해 차등 있게 벼슬을 추증(追贈)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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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산] 반남박씨 연역 호장공 (2019-03-03 19:45)

반남박씨의 연역 호장공후 야천공


 

  成俔慵齋叢話에서 廣州李氏昌寧成氏를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문벌가문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선후기에 문벌가문을 거론하면서 반남박씨를 예외로 할 수는 있을까? 學問.文章.任宦 어느모로 보나 반남박씨는 조선후기에 굴지의 명가임을 분명했고, 안동김씨(仙源,淸陰系). 연안이씨(月沙系). 동래정씨(林塘系) 등 유수한 가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성장해 왔다. 그러나 반남박씨 역시 여느 사대부 가문과 마찬가지로 그 출발은 미미했으니, 시조 朴應珠 潘南 고을의 호장이었다. 현재 자세한 서적에는 전하지는 않지만 그는 대략 13세기 중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활동한 인물로써 한번도 반남을 떠난적이 없는 말 그대로 潘南鄕人이었다. 이처럼 그는 한 고을의 호장으로 일생을 살았지만 반남박씨 내에서는 戶長公으로 불리며 후손들의 무한한 추모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반남박씨 향리의 역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우선 朴應珠의 아들 朴宜는 과거에 급제하였고 손자 朴允茂 역시 진사시에 합격하여 良醞同正을 지냈다. 그리고 증손 朴秀密直副使를 지냄으로서 鄕役보다 上京從任의 길을 걸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까지만 해도 향역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었고 사회적 기반도 여전히 향리인 潘南에 있었다. 이런 정황은 朴允茂의 차제 朴麗錦城縣長을 지냈고, 朴應珠 이후 누대의 묘지가 潘南에 소재한 사실에서 증명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반남박씨 朴尙衷牧隱 李穡의 문인으로 鄭夢周와 함께 성리학의 보급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학자 관료였다. 그 역시 반남에서 출생했으나 1353(공민왕2) 文科에 합격하여 사환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향리의 자손에서 중앙의 사대부 관료로 발돋음 하는 한편 선대의 세거지 나주를 떠나 송도로 이거하게 된다. 朴尙衷의 송도이거는 향리 가문에서 사대부 가문으로의 전환인 동시에 반남박씨 京派의 탄생을 의미했다.


 

 朴尙衷의 출세는 기본적으로 그의 유학적 소양에 바탕하는 것이었다.
전술한대로 그의 李穡에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李穡은 그의 처남이었다. 당대에 최고의 학식과 문한을 자랑하던 한산이씨 牧隱 가문의 혼맥은 朴尙衷의학문. 사회적 기반을 강화해주기 충분했다. 이런 바탕위에서 그는 鄭夢周, 田祿生, 李詹. 金九容.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한 시대의 풍문을 주도하였으며, 시문에 능하여 東文選에도 다수의 시가 전하고 있다.

  朴尙衷은 중앙의 관료로 활동한 20여년 동안 예의정랑, 판전교사, 직제학, 등 주로 학술, 문한직에 종사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해박한 예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祀禮를 편찬하는 한편 3년상을 몸소 실천함므로서, 유교적 예제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반면 그의 정치적 생애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여말의 격동기에 親明路線을 견지했던 그는 친원파의 거두 李仁任 일파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고, 마침내 상소를 올려 이인임의 親元路線을 정면으로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 상소는 親元, 親明 양파 대립의 촉매가 되었고, 신진 사대부가 중심을 이룬 친명파는 친원파의 공격을 받아 일망타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朴尙衷은 장형을 받고 유배 길에 오르던 중 靑郊驛에서 4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는 비명에 죽었지만 세상 사람들로부터 潘南先生으로 칭송되었으며, 그의 학술적 공로와 정치적 희생은 자손들이 사회적 입지를 강화하며 潘南朴氏라는 문벌 가문을 형성하는 정신적인 고리가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잔손들이 정치, 사상계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숙종 연간에 그에 대한 대대적인 현양 사업이 전개된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현양사업의 단서를 연 인물은 尤庵 宋時烈이었다. 1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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