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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역사 -박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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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03-29 18:03 조회2,4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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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글은 조선일보에서 가져온 글 2017.3.29일
박세당의 삶
불운했으되 강직한 철학자 박세당.불운했으되 강직한 철학자 박세당.
서계 박세당(朴世堂·1629∼1703)은 이렇게 살았다.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아버지 박정을 따라 전라도 남원 관아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죽었다. 3년 뒤 열여섯 살 위인 큰형 세규(世圭)가 죽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터졌다. 박세당은 할머니, 어머니, 두 형과 함께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를 떠돌며 피란을 다녔다. 가난했다. 열 살이 돼서야 글을 배웠다. 글 가르치던 할아버지가 이듬해 죽었다. 1660년 서른한 살에 과거에 붙었다. 장원급제였다. 각종 요직을 섭렵하며 잘나가는가 싶었다. 1666년 아내 의령 남씨가 죽었다.

1668년 나이 서른아홉에 경기도 양주로 내려가 버렸다. 양주에는 아버지 박정이 받은 사패지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박세당을 이조좌랑(정승으로 가는 요직이다)으로 발령 냈다.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의금부에서 곤장을 때렸지만 사직해버렸다(현종실록 9년 8월 11일).'

이유는 강하고 단순했다. 당쟁 혐오. 세상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후 정부에서 그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자리를 내줬지만 응하지 않았다.

1678년 두 번째 아내 광주 정씨가 죽었다. 1686년 집권당인 서인파의 잔혹상을 비난하다 함경도로 좌천된 큰아들 태유가 죽었다. 서른여덟 살이었다. 3년 뒤 둘째 아들 태보가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가 고문 끝에 죽었다. 서른다섯 살이었다.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인생이 이쯤 되면 체념하는 법이다.

박세당도 그랬다. 운명을 받아들였다. 당쟁에 신물이 났었고, 사라진 나라 명을 떠받드는 명분론에도 질려 있었다. 세상은 공맹(孔孟)을 외운다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생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여 농사를 짓고 남는 시간에 책을 읽고 책을 썼다. 고급공무원 시험 수석 합격생이었으니 영민하였고, 고비를 틀 때마다 닥친 풍파에 세상을 보는 혜안(慧眼)도 뜨게 되었다. 강직함도.


 
이미지 크게보기 의정부 장암동에 있는 박세당의 묘소.
일흔넷 된 1703년 서울 잠실 삼전도 비문을 지은 이경석의 신도비 비문을 박세당이 썼다. 이렇게 썼다. "국왕이 굴욕을 당했는데 신하가 군주의 명을 거역하면 이가 곧 패륜이다." 이경석의 글을 맹비난한 노론계 거물 송시열을 비난한 글이었다. 집권 여당의 정신적 지주를 비난해? 이어 둘째 형의 죽음에 "제사는 검소하게 하라"고 한 그의 말을 핑계 삼아 노론은 임금을 구슬려 박세당에게 전라도 옥과로 유배형을 내렸다. 죄명은 주자가례 예법을 무시한 사문난적(斯文亂賊)이지만, 실질은 '눈꼴사나운 놈'이었다. 그리고 그해 죽었다. 여기까지가 불우한, 하지만 위대한 사내 박세당이 살아온 행적이다.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석림사 계곡 입구에는 박태보를 기리는 노강서원이 서 있다.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제외된 47개 서원 중 하나다. 그 앞에 박태보의 아버지 박세당이 살던 고택이 있다. 안채는 불타 사라지고 사랑채는 남았다. 고택 안쪽에는 유택이 있다. 요절한 두 아들 무덤 뒤편에 아비가 잠들어 있다. 아내와 두 아들의 죽음, 미치광이처럼 돌아가는 세상 꼬라지 다 보고 죽은 철학자를 만나는 곳이 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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