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164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363

자유게시판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페이지 정보

no_profile 박식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03-20 13:21 조회1,888회 댓글0건

본문

중앙일보에서 옮김
 
한국과 미국의 공식 국교(國交)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의 체결로 시작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조선이 서양 국가에 문호를 개방한 첫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과 미국의 국교 수립을 양국이 직접 협상한 것이 아니고 청국(淸國)과 미국 간에 진행되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인가?

미국은 국교 수립 후 서울에 주한미국공사관을 설치했다. 조선은 5년여 동안 미국에 공관을 개설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1887년 박정양(朴定陽) 초대 주미전권공사가 워싱턴에 부임했으나 청의 간섭으로 1년 만에 국내로 소환되는 일이 벌어졌다. 왜 박정양은 청국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일까?

조선은 조미수호조약 제1조 중재(仲裁) 조항에 의지하여 몰려오는 열강 사이에서 미국의 세력균형 역할을 크게 기대하였으나, 미국은 조선을 외면하고 일본의 손을 들어 주었다. 왜 미국은 조선을 버린 것일까?

최근 중국의 부상과 중·러 밀착, 미·일 신밀월과 일본의 재무장 등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갈등으로 급변하는 동북아의 정세 속에서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은 구한말 조·미 관계를 재조명해 보는 것은 오늘날의 동북아 정세와 그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과연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온건개혁 노선의 진보성향 정치인 박정양

박정양(朴定陽, 1841~1905)은 판관과 강서현령을 지낸 박제근(朴齊近)의 아들로, 할아버지 박운수(朴雲壽)는 순흥부사를 지냈다. 그는 1864년(고종 1) 증광과 생원시에 병과로 입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수학하였으며 18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청년시절 먼 친척인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김윤식(金允植), 김홍집(金弘集), 김옥균(金玉均) 등과 만나 교분을 쌓았다. 1881년 신사유람단(神士遊覽團)의 일원으로 일본 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해 이용사당상경리사(理用司堂上經理事)가 되면서 관제개혁, 급여의 화폐지급, 관습법의 성문법화 추진 등 근대화 정책 추진에 참여했다. 1882년에 성균관대사성과 이조참판을 거쳐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맡았다.

1887년 초대 주미전권공사로 미국에 부임하였으나, 계속된 청국의 압력으로 1년 만에 귀국했다. 이후 1894년 호조판서, 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갑오개혁으로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자 회의원(會議員)이 되었다.

1889년 김홍집의 2차 내각에 학부대신(學部大臣)이 되어 을미(乙未)개혁을 추진하였으나 1895년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자 혼란을 수습한 후 내각 총리대신 서리에 임명되어 과도 내각을 조직했다. 민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나자 위정척사파 및 수구파의 대대적인 탄핵, 정치공세를 받고 파면되었으나 3차 김홍집 내각에서 다시 내부대신(內部大臣)이 되었다.

1896년(고종 33)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김홍집이 군중에 의해 살해되자, 내부대신으로 총리대신 서리와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다가 내각이 의정부로 개혁되면서 의정부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었다. 고종이 환궁하여 대한제국이 반포되고 박정양은 1897년(건양 1)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1898년 11월 황국협회(皇國協會)가 폭력으로 독립협회를 탄압한 사건이 일어나 내각이 경질되면서 다시 내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조약을 체결한 자들을 역적으로 규정, 처벌할 것을 상주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어 을사오적(五賊)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주하였다. 그해 9월 표훈원(表勳院) 총재(總裁)에 임명되고 대한제국 정부의 태극훈장(太極勳章)을 받았으나 11월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중간 생략)

 알렌은 개인적으로 박정양을 존경했다. 알렌은 회고록 《조선견문기(Things Korean, 1908)》에서 ‘조선에도 박정양같이 점잖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외국어를 못하든, 기이한 도포를 입든, 누구나 신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박정양에 관해 알게 될수록 그를 존경하게 되어 수양아버지라고까지 부르고, 박정양이 시골 관리가 되었을 때는 그곳을 찾아가 온돌방의 방석에 앉아 담배를 같이 피웠다고 회고한다. 1894년에는 고종이 총리를 천거해 보라고 하자 박정양을 천거하기도 했다.

구한말 김홍집이 개혁, 개방을 주도하고 한미 국교를 수립한 ‘근대외교의 효시’라면,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은 구미 제국에 최초로 부임하여 자주외교를 시현한 ‘근대 외교관의 효시’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1년 만에 소환되고 말았지만, 청국의 영약삼단을 뿌리치고 독자적으로 외교를 펼친 그의 태도는 높이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서양의 관점에서는 신사가 없던 구한말 조선 전통사회에서-알렌의 말처럼-인격이 훌륭한 진정한 신사였을 뿐 아니라, 독립적 사고로 무장된 자주적 외교관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