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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고쳐쓴 活塘公 碑石을 세움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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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송촌옹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10-01 23:13 조회1,797회 댓글1건

본문

陜川 活塘公碑碣을 세움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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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活塘公後孫들은 陜川時祭때에 내려가 活塘公앞에 섰을 때마다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楊州金谷先塋에서 三代가 이곳 합천의 화양동 冶川公 墓所 아래로 遷奉1900년부터 어언 100하고도 10餘年이 지나도록 유독 活塘公墓前에만 碑碣을세우지 못하였다. 어찌 후손으로서 민망하고 미안하여 낯이 붉어지지 않을 수 있으랴.

 

이곳 합천 화양동은 文康公 冶川先生이 묻히신 卜地로 나라 안에 소문난 明堂이다. 오늘날 우리 반남 박가의 자손 중 야천공의 은택을 입고 살아가는 후손들이 거의 절반에 가깝지만 공의 幽宅을 이곳 합천에 모시게 된 내력을 아는 후손도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일찍이 연산군이 亂政을 일삼아 자주 궁궐 안에서 연회를 벌리니 백성들이 궁궐 담을 넘겨다보면서 구경을 하였다. 그것이 눈에 거슬린 연산이 궐 밖 民家를 마구 헐어버리고 멀리 쫒아내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집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때쯤 父親 正郞公外叔 許 忠貞公을 따라 景福宮 근방에 사셨던 것 같다. 그 후 正郞公急患으로 돌아가시고 이어 촉망받던 두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 尙州公 마저 돌아가시니, 冶川公이 사시던 집이 그때에 헐렸기 때문에 모부인 윤씨는 고아들을 거느리고 거처할 곳을 잃게 되었다.

이에 母夫人 尹씨는 어린 삼형제를 데리고 親庭陜川冶爐縣으로 率居를 하였다.

그래서 야천공은 그곳 陜川에서 성장하셨고 性理學獨學으로 배우시어 학문을 성취하셨으니 날로 그 명성이 알려져 그 땅의 이름난 많은 선비들이 許與하며 사귀고자 하였다.

특히 嶺南觀察使로 내려와 있던 慕齋 金公의 의견을 받아드려 道內의 글방에 朱子 十訓을 써서 주며 배우게 하였으니, 의 존중받음이 이와 같았다.


 

이윽고 松堂 朴 先生門下에 들어가 학문의 성취가 높고 깊어지고 또한 嶺南의 선비들과 널리 친교를 맺으니 송당 박 선생도 스승이라 하지 않고 벗이라 하였다.

이윽고 鄕試에 급제하여 서울로 올라가 식년시大科壯元하시니 그때 主試官이던 靜庵 趙公마저 찬탄하며 玉人을 얻었다고 좋아 하였다.

 권별(權鼈)이 쓴 海東雜錄에 대한 기록은 이러하다.

나주(羅州)의 반남 박씨(潘南朴氏)로 자는 언주(彦冑)이다. 고려(高麗)의 바른 신하 상충(尙衷)의 후손으로서 참되고 솔직하여 거짓이 없어 안팎이 한결같으니, 보는 자가 다 옥 같은 사람이라 했다. 독실한 뜻은 옛 학문을 좋아하며 또한 글재주도 있어 별과(別科)에 뽑혔으나, 앞서 식년과(式年科) 장원으로 급제하였기에 이것으로 기묘의 화를 면했다. 경인년에 사간(司諫)이 되어 동료들과 더불어 김안로(金安老)를 제거할 모의를 하고 내일 중 아뢰기로 약속하였는데, 그때에 권예(權輗)가 대사간이었고 채무택(蔡無擇)이 정언(正言)이었다. 공무를 마치고 공()이 친구 임건(任健)을 가서 보고 이 말을 했더니, 임건이 말하기를, “동석한 사람을 다 믿을 수가 있는가?” 하니, 공은 깜짝 놀랐다. 처음부터 채무택(蔡無擇)이 그(김안로)의 당파인 것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이었다. 곧 대간(大)의 집으로 가서 먼저 정언(正言)을 쫓아내려고 모의하려 하였으나, 정언(正言)이 이미 권()의 집에 이르러서 권()의 마음이 이미 채무택과 하나가 되어있어서 다음날 패하게 되었다. 합천(陜川)의 고향에 와서 죽었다. 기묘록

, 선생은 큰 덕과 깊은 학문으로 이른 나이에 영기(英氣)를 드날렸으며 인품이 빛나고 문장이 뛰어났다. 임금께 간쟁(諫爭)하고 정색으로 토론함으로써 장차 임금을 보필하고 큰 정책을 펼치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소인배의 배척을 받아 자취를 감추고 떠돌다 외가인 윤씨(尹氏) 집안에 의지하게 되었다.

윤씨는 본관이 파평(坡平)인 대성(大姓)으로 대대로 합천에 살았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여러 아드님들이 모두 어려 고향으로 운구(運柩)할 가망이 없었으므로, 윤씨 가문에서 불쌍히 여겨 땅을 빌려 주어 우거(寓居)하던 집 뒤에 장사하였으니 지금의 해좌(亥坐)의 언덕이 바로 이곳이다.

연암공(燕巖公)이 쓰신 화양병사기(華陽丙舍記)중에서

 

그때부터 이곳 文康公 冶川公 葬事지낸 陜川華陽洞 땅은 우리 潘南朴哥들의 聖地로서 他 姓氏들도 알아주는 名所가 되어있다.

 

冶川公夫人이신 貞敬夫人 洪氏가 돌아가시자 나라에서 楊州葬地를 내려 冶川公의 묘소와는 천 리나 떨어진 곳에 따로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어서 아드님이신 監正公과 손자이신 活塘公도 그곳 楊州땅에 장사를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후 300년하고도 10년이 훨씬 지난 후 高宗임금 때인 庚寅年(1900), 나라에서 國葬때에 임금이 묻힐 명당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의 무덤을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리하여 府院君과 그 후손들은 양주의 지금 일패동으로 모셔갔고 정경부인 홍씨 할머니와 큰 아드님이신 감정공과 손자인 활당공은 합천의 화양동으로 緬奉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섯 분의 遺骸를 다섯 대의 喪輿千里運柩하였으니 그 어려움과 곤란을 어찌 헤아리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楊州의 묘소에 세웠던 모든 石物壙中 주위에 묻었던 것이다.

 

世譜房注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貞敬夫人 洪氏 = 옛 묘지에 碑碣이 있었으니 嘯皐公 承任하고 礪城尉 宋寅이 글씨를 썼다. 경자년에 천봉할 때

댓글목록

宗緖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宗緖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본문 중간에, '야천공의 부인이신 정경부인 홍씨가 돌아가시자~ 그리하여 부원군과 그 후손들은 일패동으로 모셔갔고, ~ 합천의 화양동으로 면봉을 하게 되었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대로 읽어보면 1900년에 홍씨부인 묘, 감정공, 활당공 묘를 합천으로 이전하고, 반성부원군 묘는 일패동으로 이장했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정확히 표현하면, 선조임금때 의인왕후의 할머니이신 정경부인 남양홍씨가 돌아가시어 나라에서 양주 금촌(지금의 일패동 반성부원군 묘역)에 장지를 내렸으며, 홍씨부인 묘를 쓰고, 시묘살이 2년만에 반성부원군이 돌아가서 홍부인묘 뒤 동록에 묘를 썼고, 다시 1년후 감정공 묘를 홍부인 묘 아래에 썼습니다. 그후 졸헌공은 홍부인묘 뒤쪽 서록에 모셨습니다.

1900년에 홍릉(명성왕후묘-청량리)의 기운이 안 좋다 하여 남양주 금곡(현 홍유릉)으로 천장하기로 하고, 반경 2km이내를 해자구역으로 삼으면서 홍부인묘, 감정공묘는 합천으로 활당공 묘는 안산으로, 졸헌공 묘는 파주로, 반성부원군묘는 어딘가로 이장하였습니다.

1910년에 한일합병으로 왕조가 쇠락하니, 해자구역도 해제가되어 반성부원군묘는 1914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으나, 반성부원군 사손 박승덕이 1910년경 일패동 종산을 전주이씨에게 매각하여, 반성부원군묘는 남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고, 1969년경 능선 너머 현재위치로 이장하였습니다.

을유보의 홍씨부인 묘산도와 봉분 배치 설명과 갑자보의 반성부원군 묘산도,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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