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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과 망종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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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봄바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6-04 21:23 조회1,7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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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節候 와 俗節】
현충일은 매년 6월 6일 이 [현충일] 이고
2016년, <丙申년> 은 [망종일] 다음날이 [현충일] 이다,
○현충일은 나라를 지키다가 산화(散華)하신 [호국영령(護國英靈)님께
제사 드리는 날이다]
○현충일은 1956년 4월 14일 제39차 국무회의 의결로 제정(6월 6일)되었다
망종과 현충일이 항상 겹치는 것은 아니며 상, 하, 1∼2일의 차이가 나기도 하나 겹치는 해가 많다,
○현충일의 유래는 그해에 가장먼저 수확하는 곡식(밀,보리)으로 호국신께 제사를 올리는 망종날 의 옛 풍속에서 유래 하였다 하기도 하고 고려사에 근거 하였다 하기도 한다 또 한국동란이 일어난 6월을 잊지않기 위하여 6월6일로 정하였다는 설도 있다
○[高麗王朝史]에 8代顯宗,5年6月 庚申日條에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군인으로 국경을 지키러 갔다가 도중에서 죽은자는 관(官)에서 염구(殮具)를주어 그유골(遺骨)을 본가에 역마(驛馬)로 보내게 하라,
[原文=庚申敎曰 防戌軍道死者 給殮具函 其骨驛送于,(高麗崇義會編에서)]
 
◎=설립경위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군이 창설되어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여 오던 중 북한 인민군의 국지적 도발과 여수/순천사건 및 각 지구의 공비토벌작전으로 전사한 장병들을 서울 [장충사] 에 안치하였다.그러나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육군에서 묘지 설치문제가 논의되어 1949년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서울근교에 묘지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6.25전쟁으로 묘지 설치문제는 중단되었고 각 지구 전선에서 전사한 전몰장병의 영현은 부산의 [금정사]와 [범어사]에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를 설치,봉안하여 <육군병참단 묘지등록 중대> 에서 관리하였다.
계속되는 격전으로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육군에서는 다시 육군묘지 설치 문제가 논의되고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주관 하에 묘지후보지 답사반을 구성하여 제1차로 대구지방, 제2차로 경주지구 일대를 답사한 결과 경주시 형산강 지류인 천북대안 일대를 육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추진하던 중, 군 고위층에서 현지를 답사하여 검토한 결과 지역적으로 편재되어 있고, 침수의 우려가 많을 것을 고려하여 타 지역으로 후보지를 재선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내려져 일단 중지하게 되었다.
1952. 5. 6.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 육군묘지 설치문제에 대하여 논의한 결과, 육군묘지를 설치하게 되면 타군에서도 각기 군 묘지를 만들어 관리상 많은 예산과 인원이 소요되고, 영현관리의 통일성을 기할 수 없는 등 여러가지 폐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육군묘지 설치문제는 일단 보류하도록 지시하고, 3군 종합묘지 설치를 추진하되, 묘지의 명칭은 [국군묘지]로 칭할 것을 결의하였다.
1952. 5.26. 국방부 주관으로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하여 3군 합동 답사반을 편성하고, 동년 11. 3. 군묘지설치위원회 를 구성한 후 ‘52.11월부터 ’53. 9월까지 11개월 동안 7차에 걸쳐 10개 지역을 답사하였다. 답사 결과 동작동 현 위치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여’1953. 9.29.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하고 ’1954. 3. 1. 정지공사를 착공한 이래 3년에 걸쳐 묘역 238.017㎡ 을 조성하고, 그 후 연차적으로 68년 말까지 광장 99.174㎡, 임야 912.400㎡ 및 공원행정지역 178.513㎡을 조성하였다. 1955. 7. 15. 군묘지 업무를 관장할 [국군묘지관리소]가 발족되고, 이어서 1956. 4. 13. 대통령령으로 [군묘지령]이 제정되어 군묘지 운영 및 관리를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되어 전사 또는 순직한 군인, 군무원이 안장되고 덧붙여 순국선열 및 국가유공자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안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6.25 전쟁으로 발생한 많은 전사 장병 처리를 위해 지금까지 군인위주로 이루어져 왔던 군묘지 안장업무가 1965. 3. 30. [국립묘지령]으로 재정립되어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이 확대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삶을 희생하고 아울러 국가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분들을 국민의 이름으로 모시게 되어 그 충의와 위훈을 후손들에게 영구히 보존, 계승시킬 수 있는 겨레의 성역으로서 국립묘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2005. 7. 29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제정 공포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 제7649호, 시행 2006.1.30"에 의거 동작동 국립묘지의 명칭이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고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도 안장대상자에 포함되었다.
 
◎=지형지세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강과 과천 사이 넓은 벌판에 우뚝 솟은 관악산 공작봉(孔雀峰)기슭에 위치해 있다. 공작봉은 관악산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뻗어내려 불끈 솟아올랐다가는 엎드리는 듯 줄기와 봉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면서 늠름한 군사들이 여러 겹으로 호위하는 모양으로 기운이 뭉쳐 있다.
사방의 산은 군인들이 모여 아침 조회를 하는 것처럼 보이고 지하의 여러 갈래 물줄기가 교류하여 생기가 넘치는 명당자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체의 형국은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孔作張)이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 이다.
 
즉, 좌청룡(左靑龍 )의 형세는 웅장한 산맥의 흐름이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 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는 형상이고, 우백호(右白虎)의 형세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사방의 봉우와 산허리는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다정하게 마주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 뿔 모양이며 한강물은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들어 마치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리며 공작봉 을 감싸 흘러 내려가고 있다.
이와 같이 국립서울현충원이 위치한 공작봉은 산수의 기본이 유정(有情)하고산세가 전후좌우에 펼쳐져 흐르는 듯하여 하나의 산봉우리, 한 방울의 물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은 곳이 없으며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渴形象)으로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 이라 할 수 있다.
 
◎= 현충일의 의미와 제정유래
현충일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국토방위의 참여하여 산화 한 전몰장병의 영령에 대하여 생전의 위훈을 추모하고 명복을 기원하는 한편, 그 유가족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고 조국통일 성업에 대한 온 국민의 결의를 다지는 날이다
[현충일] 은 지난 1956년 4월 19일 대통령령 제1145호(국방부령27호)를 근거로 제정되었으며, 이 날을 기해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정부주관의 현충일 중앙 추념식과 전국 각지에서 민간 추모행사를 동시에 거행하고 있다.
○ 6월6일을 특별히 현충일로 제정하게 된 이유는 분명치는 않으며, 다만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 참고가 될 만하다.
○6월은 많은 장병이 호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6·25전쟁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6일은 1년 24절기 중에 9번째 절기인 芒種日이다.
 
○<1년중 손이 없다는 淸明日에는 莎草를 하고>, <한식일에는 省墓를 하며> <망종일에는 제사를 지내는> 옛 풍습이 지금까지 전해저 오고 있다.
 
○옛기록을 보면, 고려 현종 5년 6월 6일에는 조정에서 장병의 뼈를 집으로 봉송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농경사회에서는 보리가 익고 새롭게 이양이 시작되는 망종일이 가장 좋은날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동안 현충일 추념식의 성격이 6·25전몰용사를 추모하는 행사로 일반에 잘못 인식되어 왔었으나 1991년 행사부터는 모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개념으로 전환시켜 시행하고 있다.
(자료제공,= 안동보훈지청 제공 - 연천향교 박동일 辛卯孟夏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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