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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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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서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5-31 08:30 조회1,8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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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장

[네이버 지식백과] 호장 [戶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려·조선 시대 향리직()의 우두머리.

개설

부호장()과 더불어 호장층을 형성, 해당 고을의 모든 향리들이 수행하던 말단 실무행정을 총괄하였다.

내용 및 변천

나말여초 지방호족들이 조직했던 지방 관반() 최고위직인 당대등()을, 983년(성종 2) 이직()개혁에 따라 호장으로 개편하였다. 이때부터 지방에서 토호적() 성격을 띠고 독자 세력을 유지하던 호장세력은 중앙의 집권화정책에 따라 독자성을 상실하고 지방통치체제에 흡수되어 지방관의 사용인이 되었다. 반면,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직접 모든 행정공무를 집행하였다.

1018년(현종 9) 향리의 정원제가 마련되면서, 주()·부()·군()·현()의 경우는 1천정() 이상에 8인, 5백정 이상은 7인, 3백정 이상은 5인, 1백정 이하는 4인이었고, 동서제방어사(西使)·진장() 지역의 경우는 1천정 이상에 6인, 1백정 이상은 4인, 1백정 이하는 2인이었다. 이러한 복수 호장제는 지방의 특정세력이나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로 파악된다.

또 같은 해에 향리의 공복제()가 마련되었는데, 호장은 자삼()에 화()·홀()을 그 내용으로 하였다. 그리고 호장을 임명할 때는 해당 지방관이 호장을 추천, 상서성()에 보고해 승인, 급첩()하도록 하였다. 이어 1051년(문종 5) 향리의 승진규정에 따른 9단계의 서열이 정해지자, 호장은 그 최고위직이 되었다.

한편, 호장에는 섭호장()·권지호장()·상호장()·수호장()·안일호장()·정조호장() 등이 있어 그 임무를 분담하였다. 섭호장은 권지호장과 흡사해 단지 제반 지방사무를 섭행했던 것으로만 파악된다.

상호장은 고려 의종 이전에 중앙집권화정책이 강화되면서 다수의 호장들을 포함한 향리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필요에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상호장은 읍사()를 구성해 인신()을 가지고 공무를 집행했고, 부정행위가 있을 때는 호장인()을 받을 수가 없었으며, 일명 수호장이라 하였다. 호장인신은 해당 고을에 명령을 발하는 권한을 말하며, 지방관이 없는 지역에서는 관인()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안일호장은 나이 70세에 이른 퇴역 호장으로 998년(목종 1)에 시행되었다. 정조호장은 세수()에 예궐숙배()하는 직무에서 연원된 것으로 국가의 경조사 때에 군현을 대표해 상경숙배했으며, 상계리()의 구실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호장은 호구장적()의 관장 및 전조()·공부()의 징수 상납, 역역()을 동원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 외에 무적 기반()을 배경으로 호족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궁과()로 시험해 주현일품군()의 별장에 임명되는 등 지방군사조직의 장교가 되어 주현군을 통솔하기도 하였다.

호장가계()는 대체로 직이 세습되었고, 같은 신분간에 통혼()이 이루어졌다. 또한, 자손에게는 지방교육의 기회와 더불어 과거의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이를 통한 중앙관료진출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고려 후기에 호장층들은 무반직·기술직·잡과()와 첨설직()·동정직() 등 비실직() 품관직에 나아가 점차 신분상승을 꾀했으며, 조선시대 양반계층을 구성하는 주요 세력층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의 법전체제에 따라 호장층은 중인층()으로 신분이 고정되어 신분상승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자기도태현상을 낳았다. 단지 향리직의 수장()으로서 조문기관()·장교 등과 같이 삼반체제()를 유지해 아전으로서 지방관의 제반업무를 보좌하였다. →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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