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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이 傳하는 文康公 冶川先生의 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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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2-26 21:15 조회1,820회 댓글0건

본문

古典하는 文康公 冶川先生記錄.

潘南朴氏 世譜世蹟篇에 우리 선대조(先代祖) 文康公 冶川先生 遺事의 첫 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xml:namespace prefix = "o" />


朴紹 癸丑生 字彦胄 未及第 登己卯春式年壯元 以是免斥 官至司諫 以他事罷 歸田里卒. - 金正國 己卯黨籍. -

그런데 이 글의 번역은 경신보(庚申譜)와 임진보(壬辰譜)가 약간 다르다. 


경신보(1980)에 실린 번역문은 이러하다.

朴紹癸丑生으로서 彦胄文科에는 아직 及第하지 아니하고 己卯年 式年으로 보이는 司馬試壯元이 되었기 때문에 排斥하고 司諫까지 이르렀으나 다른 事件으로써 退官하여 故鄕으로 되돌아와서 하였다. - (金正國己卯黨籍에서 ). - 


그러면 임진보(2012)의 번역은 어떠한가?

박소(朴紹)는 계축년 생으로 자가 언주(彦胄)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다, 기묘년 봄 식년시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함으로써 배척되지 않고, 관직이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다른 일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 김정국(金正國)기묘당적(己卯黨籍)에서 나온 것이다. -  


그런데 경신보의 번역문에서는 본문에서는 보이지 않는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고 사마시(司馬試)에서 장원이 되었다고 하는 구절(句節)이 번역되어 있다. 그러면 왜 이러한 문장의 번역되어 있을까?

아마 그렇게 미루어 짐작을 하고 번역을 한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앞에 나오는 미 급제(未及第)라는 문구(文句)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무엇인가 미진(未盡)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원인은 김정국이 기록한 원문을 살펴보면 확연(確然)이 나타나는데사재집(思齋集)에 있는己卯黨籍에는 擧 賢良科.라는 문구가 未 及第 라는 구절의 앞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思齋集에 있는기묘당적의 기록이다.

朴紹癸丑生字彥胄擧賢良科未及第登己卯春式年壯元以是免斥官至司諫以他事罷歸田里

己卯黨籍 


사재집에 있는 원문(原文)과 전사(轉寫)한 기록에는 중요한 부분을 누락시킴으로써, 번역에 혼돈이 오지 않았나하는 생각인데, 최초에 전사(轉寫)한 분의 실수? 가 아쉽다.

위의 원문을 번역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박소는 계축생으로 자는 언주이다.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기묘년 봄 식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림으로 부터)배척은 면하였다. 관직은 사간에 이르렀는데 후에 다른 일로 파직이 되어 전리로 돌아가서 졸하였다 


사실 김사재(金思齋)는 야천공과는 당대(當代)를 함께 살아간 인물이면서 또한 교유가 있었고, 그 시대의 석학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천금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이 기록은 후대의 문인학자들에게는 하나의 저본(底本)이 되어 여러 기록에 전사(轉寫)되어 있는데, 우리 반남박씨 세적편도 그 중의 하나이다 


김 사재(金思齋) 기록한기묘당적은 그 내용이 간략하지만, 후대(後代)의 학자들은 이글을 저본(底本)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 저본은 옮겨져 필사(筆寫)될 때마다 약간씩의 탈 보충(脫補充이 보이는 것은 시대 상황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한 글자를 넣고 빠트리는데 따라 한 사람의 역사적 평가가 달리 나타날 때에는, 거듭하여 살피고 살펴서 한 글자라도 탈 오자(脫 誤字)라도 없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게 한다.

안로(安璐)기묘당적 보유(己卯黨籍補遺)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朴紹癸丑生字彥胄擧賢良科未及己卯春式年壯元以是免斥官至司諫後以他事罷歸田里而卒 



그런데 이 문장은 未及第己卯春式年壯元이라는 연결문장에서 未及第己卯春式年壯元으로 及第 가운데로 가 들어가 있다.

그러하다면 세 문장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여보자.

朴紹癸丑生字彥胄擧賢良科未及第己卯春式年壯元

以是免斥官至司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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