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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주례. <독립투사 박영준 결혼증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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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태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7-13 14:31 조회3,5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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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 김구, 증혼 조소앙… 붉은 증서에 새긴 광복군 부부의 결혼서약

김민기자

입력 2015-07-13 03:00:00 수정 2015-07-13 08:48:45

 
독립운동가 박영준-신순호씨 딸 박천민씨 가보 2,129점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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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 씨의 할아버지 박찬익 씨(뒷줄 오른쪽)가 1940년 백범 김구 선생(앞줄 가운데)과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만들어 준 중국인 왕백수 부부(앞줄 양쪽) 등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위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1943년 박 씨 부모의 결혼 증서로 ‘임시정부가 최초로 발행했고 김구 선생이 주례를 섰다’는 내용이 붉은색 종이에 적혀 있다. 경기도박물관 제공


1970년 2월 서울 동작구 상도동. 불이 활활 타는 2층 단독주택 앞에 박천민 씨(60·여)가 서 있었다. 당시 박 씨의 나이는 17세. 그의 어머니는 아직 불길이 번지지 않은 1층에서 궤짝 두 개를 끌고 나왔다. 어머니는 다급하게 “너는 어디에도 가지 말고 이걸 지켜라. 이건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보란다”라고 말했다. 박 씨는 불이 꺼질 때까지 꼼짝 않고 궤짝을 지켰다. 교복과 책이 불에 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뒤 불은 꺼졌지만 2층은 모두 타버렸고 1층은 물바다가 됐다. 일주일 뒤 박 씨는 중학교 졸업식에 사복을 입고 갔다. 그 대신 그가 지켰던 궤짝은 무사했다.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지방을 돌아다니던 박 씨가 잊고 있던 궤짝 앞에 다시 선 것은 50대 후반 무렵. 노환으로 몸이 편찮아진 어머니가 그에게 가보를 맡긴 것이다. 6·25전쟁 때 어머니가 궤짝 속 물건들을 목숨처럼 소중히 지켰다는 사실도 이때 처음 알았다.

궤짝을 열자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을 누볐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의 흔적들이 한 아름 쏟아졌다. 박 씨의 아버지 남정 박영준(1915∼2000)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했다. 박 씨의 어머니 신순호(1922∼2009)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인 신규식의 조카이자 광복군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박 씨의 할아버지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남파 박찬익(1884∼1949)이다.

2009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년 뒤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자 박 씨는 궤짝 속 자료를 비롯해 부모의 유품을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지난해 7월부터 현재까지 박 씨가 경기 용인시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는 2,129점에 달한다.

기증품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박영준과 신순호의 붉은색 결혼증서다. ‘우리 두 사람이 오늘에 부부를 맺고…’로 시작하는 증서에는 ‘주례 김구, 증혼 조소앙’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결혼식은 1943년 12월 12일 중국 충칭 우스예항 임시정부 청사 대강당에서 치러졌다. 강당은 독립운동가 가문의 경사를 축하하는 한국인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이날 신부가 입은 중국식 전통 의상 치파오도 기증됐다. 이 밖에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사진, 단군 영정, 광복군 훈련 사진 등 다양한 자료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박 씨가 기증한 자료는 23일부터 10월 25일까지 ‘어느 독립운동가 이야기’라는 주제로 전시될 예정이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박 씨의 가족사 자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그 자체”라며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국사 교사를 지냈던 박 씨는 “어머니는 과거 중국에서 학교 다닐 때 중국인들로부터 ‘망국노’라고 불린 것을 내내 가슴 아파했다”며 “그 말을 다시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용인=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박찬익(朴贊翊,) 188412~194939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남파(南坡), 아명은 박창익(朴昌益)이다.

동량(오창공)-(금양위)-세교-태두-필하-사정-형원-종악(우의정)-만수-제민-대양-영주-봉서-찬익-영준-천기.천민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박봉서(朴鳳緖)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4년 상경하여 상공학교 동기생 박원호의 추천으로 보안회에 가입하여 일본의 황무지 개척 요구안에 대한 반대투쟁에 참여하였다.

1907년 초에는 비밀 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박호원 등과 서부지방을 순례하면서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야학을 조직하였다.[1]

 

19084월 다시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이때 나라를 일제에 강점당하자 만주 용정으로 망명하였다. 연길에서 간민교육회를 조직,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서일과 함께 대종교 항일무장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191811월에는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김동삼,조소앙,이동녕 등 38인의 동지와 함께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1]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423일 서울의 국민대회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을 때는 평정관에 선출되었다.

19213월 임시 정부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무차장대리로 외교임무를 실질적으로 전담하였으며 주로 대중국 외교에 주력하였다.[1]

 특히 중국 국민당의 쑨원이 광동에 중국호법정부를 수립하자 임시정부를 승인받는데 기여하였으며,

19222월에는 광동에 주재하여 호법정부와의 외교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1926931일 침체되어 있던 대종교 교도들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윤세복, 정일우 등과 귀일당을 조직하였다.[1]


임시정부 활동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고,

193010월 중국 국민당 제 4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임시정부 대표인 조소앙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325월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후임시정부를 가흥으로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하여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19326월에는 다시 상해로 잠입하여 일제 앞잡이 옥관빈과 상하이 한인친우회 위원장으로 일경의 밀정 노릇하던 유인발 등을 적발,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하였다.[1]

이후 외교술로 대외교섭과 재정조달의 임무를 맡아왔다.[2]

1934년에는 한국국민당과 결별하였다가[1]

6월경부터 박찬익은 한국국민당의 자금관리 문제를 김구에게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박찬익은 김구와 불화가 생겼고, 더욱이 자금운영문제로 의심을 받자 미련없이 자리를 떠났다.[3]

19387월 이시영, 이동녕 등의 주선으로 다시 김구와 손잡고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의 일을 보게 되었다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임정이 중경으로 옮긴 뒤에는 법무부장 겸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광복시까지 임시 정부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한편 194210월에는 한중문화협회의 한국측 이사로 선임되어 한.중 친선에 기여하였으며,

19435월에는 김구, 홍운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1]

 

해방후

19458.15해방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장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였다.

19462월 한국독립당 중국 총지부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47년 중국국공내전 상황에서 한인군대의 필요성에 대한 계획서를 중국 당국에 제출 승인받아 동북행영 장연지구에 보병독립총대를 설치하였다.

19484월 김구의 남북협상을 위한 월북을 만류하기 위해 인천 월미도로 귀국하였으며,

1948년 말에는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김구의 은퇴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사후

194939일 서울 창신동에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31119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朴英俊(1915--2000)

임시정부 의 외곽단체인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를 시작으로 한국광복군 제3지대 훈련총대장 등을 지내며 항일운동을 벌였다. 한국전력주식회사 사장 광복회고문 등을 역임했다.

백범기념사업회장을 지낸 애국지사 박영준2000327일 오전 8시 삼성서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85

1977 ;건국훈장 독립장 수상

아들; 박천기

; 天敏(대원예고 교사) 사위 이흥권(인천지법 부천지원장)

2000327일 타계한 애국지사 박영준(85 예비역 소장)옹 은 1930년대부터 중국에서독립군으로 활약했고, 건군이후에는 초대 정훈감을 지낸 군의 원로다.

특히 박장군의 부친은 상하이 임시정부 법무부장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남파 박찬익(48년 작고)선생이어서 이들은 부자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42녀중 막내로

1915년 중국 퉁징(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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