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懿仁王后에 대한 祭文과 輓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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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3-03 21:13 조회2,5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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懿仁王后에 대한 祭文輓詞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55(음력 415) ~ 160085(음력 627))는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의 정비(正妃)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성은 박(). 아버지는 5위도총부도총관과 영돈녕부사 등을 역임하고 후일 영의정에 추증된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이다.

정식 시호는 장성휘열정헌경목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 

155555(음력 415)에 출생하여, 선조의 즉위 2년째인 1569년에 열다섯 살의 나이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우리 박씨네 집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대비(大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선조(宣祖)의 정비(正妃)를 물색하자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숙부(叔父)인 대사헌 남일공(大司憲 南逸公)이 인덕(仁德)이 깊고 조신한 자신의 조카 따님을 인순왕후(仁順王后)에게 권하였다고 한다.

그때에 이미 16세인 선조(宣祖)에게는 후궁인 공빈김씨(恭嬪 金氏)를 총애하고 있었기에 왕비(王妃)임에도 불구하고 왕실(王室)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후사(後嗣)의 생산을 기원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원찰(願刹)을 설치하였고 건봉사(乾鳳寺)와 법주사 등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 자주 재물을 베풀었다. 1590년에 장성(章聖)의 존호(尊號)가 올려졌다.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성(都城)을 떠나 서쪽 변방(邊方)으로 파천(播遷)한 선조는 어가(御駕)가 평양(平壤)을 떠나 박천(博川)에 이르자 후궁인 인빈 김씨를 데리고 의주(義州)로 갔고, 의인왕후(懿仁王后)는 선조(宣祖)와 헤어져 강계(江界)로 떠났다. 이후에 한양이 수복되자 선조는 인빈 김씨를 데리고 한양으로 돌아갔지만 의인왕후는 여전히 뒤에 떨어져 해주(海州)에 머물렀다. 왜군이 물러난 도성(都城)은 도시(都市) 전체가 잿더미로 변하여 궁궐 같은 건물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살던 집밖에 없었다. 선조도 그곳에 들어가 머물 수밖에 없을 정도였기에 왕비는 돌아와도 머무를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왕비는 두 숙부(졸헌공과 도정공)등 늙은 신하들이 모시고 해주에 남았다.

정유년(1597)에 왜란이 재발하자 이번에도 선조는 인빈 김씨를 데리고 피난(避亂)을 떠났고, 왕후는 세자인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연이은 피난길로 몸이 약해진 왕후는 왜란이 끝난 후인 160085(음력 627)46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하셨다. 

지아비인 宣祖는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술회하기를 "대행(시호를 받기 전의 왕후를 말함)은 두 대비(인순왕후와 인성왕후)를 받들어 섬김에 정성을 다했고, 나를 섬김에도 공경을 다하여 한결같이 어김이 없었다. 외가의 사삿일을 요구하는 일도 없었으며 후궁들을 대함에도 은애가 지극하여 그들 보기를 수족같이 했다. 또한 여러 아이들을 어루만지기를 자기 소생과 같이 항상 자신의 곁에 두었기에, 내가 간혹 그 소행을 시험하여 여러 아이들을 장난삼아 질책하면 하나같이 대행의 뒤로 도망가 숨었으며 대행은 곧 치마폭을 당겨 그들을 가려주었다. 대행은 평생 동안 조급히 서두르는 언행과 표정을 나타내지 않으며 궁인과 여종에게도 노기를 내거나 꾸짖지 않았다. 투기하는 마음, 의도적인 행동, 수식하는 말은 일체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종종 권할지라도 하지 않으니 그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인자하고 관후하며 유순하고 성실한 것이 모두 사실인 바, 저 하늘에 맹세코 감히 한 글자도 과찬이 아니다. 이러한 덕행으로도 자식을 두지 못했고 장수하지 못했으니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며 덕망 높은 왕비의 죽음을 슬퍼하며 칭송하였다.

지아비로서의 이러한 칭송은 고금을 통하여 의인왕후에게만 있다. 그럼으로써 왕비의 일생은 빛을 발하는 것이다 

왕후는 생모(生母)인 공빈 김씨(恭嬪 金氏)를 잃은 광해군(光海君)을 적극 두호하고 감싸 안았다. 광해군이 저사(儲嗣)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근저(根柢)에는 왕후가 광해군을 가르치고 훈육한 어머니로서의 자애로움이 있었고, 그러한 왕후의 후광이 신하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어 저사(儲嗣)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승하 이후인 1604년에 휘열(徽烈), 1610년에 정헌(貞憲), 고종 대인 1892년에 경목(敬穆)의 존호가 추상되었다. ()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목릉으로 남편인 선조와 그의 계비인 인목왕후와 같은 경역 내에 묻혀있다.

이제 415번째의 기신(忌辰)을 맞이하여 당세(當世)의 문사(文士)인 신하(臣下)들의 주옥같은 문장으로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을 지어 애도하였고, 이제 그 글이 문집에 남아있는데, 이제 그들의 문집에 있는 문장(文章)을 감상하는 것도 뜻있는 일이다.



懿仁王后 遣官 祭文 象村 申欽

하늘이 상서를 기르니 화려한 가문에 경사가 넘쳤도다.

훌륭한 여자 태어나니 화목하다 좋은 소문이 났도다.

안의 일 공경히 받들어 아침저녁으로 한결같이 하였도다.

곤의(坤儀 왕비의 예의범절)가 근엄하니 국모의 지표가 이루어졌도다.

구슬 같은 도량 깊고 꽃다운 범절 밝았도다.

공경은 굉연(綎延)에서 시작하고 교화는 규목(樛木)부터 했도다.

아랫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무리를 덕으로 거느렸도다.

총애하는 사람에게는 사사로운 청탁을 막았고 친속에게는 참람을 경계하였도다.

함께 종사(宗社)를 맡아 천지의 귀신을 같이 받들어 30년이 넘도록 시종 한결같았도다.

지난 난리를 만났을 때 함께 파천(播遷)의 곤란을 겪었도다.

더욱 신중히 보필하여 잘못이 없게 했도다.

명명한 속에 도움을 받아 한없이 복을 내리리라 여기었는데,

딱하게도 내가 복이 없어 거듭 앙화를 만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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