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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이조참판 박공(남곽공 동열) 비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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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2-09 08:53 조회6,3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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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관찰사 증이조참판 박공 비음기

 

종대부(從大父) 남곽공(南郭公)께서 天啓 壬戌(1622 光海14)에 양주 우사(寓舍)에서 졸하시니, 처음에 집 남쪽 산등성이에 장례를 모셨는데 금촌(金村) 선영(先塋)과는 겨우 3쯤 떨어진 곳이다. 고 상촌(象村) 申文貞公[신흠(申欽)]이 묘비명(墓碑銘)을 짓고, 청음(淸陰) 金文正公[김상헌(金尙憲)]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모두 옛 묘소에 사용했다고들 이야기한다. 32년 후인 崇禎 癸巳(1653 孝宗4)에 신부인(申夫人)께서 남원부(南原府) 관아(官衙)에서 봉양을 받다가 돌아가시자 아들인 첨추공(僉樞公) ()와 부사공(府使公) () 두 분께서 의논하여, 도 옮겨와 영암(靈巖)의 독치(纛峙) 미좌(未坐)의 언덕에 천장(遷葬)하였는데, 그 유현(幽顯)[묘비명(墓碑銘)과 묘지명(墓誌銘)]은 미처 고치지를 못하였다. 또 그 24년 후에 사증손(嗣曾孫)인 판관(判官) 태장(泰長)이 나에게 어찌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므로, 이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대개, 이에 앞서 공의 아우 오창공(梧窓公)께서 인근지역[강진(康津)]에 유배되었을 때, (1625 仁祖3) 마침 내자(內子)[정경부인(貞敬夫人)민씨(閔氏)]의 상을 당하시자 어떤 술인(術人)[음양가(陰陽家), 풍수]이 산소 자리를 바치면서 축하한 일이 있었는데, 오창공이 미처 쓰지 못하시었다. 신부인(申夫人)께서 남쪽 지방에서 돌아가신 뒤로 드디어 공 내외분의 묘소를 아래 위에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혈()은 바로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의 부소산(扶蘇山)과는 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그 아래에 실로 선조(先祖) 호장공(戶長公)과 급제공 (及第公)두 분 묘소가 있다. 그리고 외조부 임공(林公)[() 구령(九齡)] 또한 같은 군()의 청냉동(淸冷洞)에 있으니 처음부터 객지가 아니다. 지금은 부사공 (府使公)양대兩代)를 잇달아 그 옆에 써서 족장지(族葬地)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에 대해 감회가 있으나, 공의 덕행과 사업은 대부분 비문(碑文)과 묘지(墓誌)에 있는데, 하물며 두 분 [상촌(象村)과 청음(淸陰)]과는 평생 친구로서 힘써 서로 장점을 보고 배워 선해지려 하셨을 터이니 어찌 군말이 필요하겠는가. 나 또한 오창공의 손자이다. 일찍이 그 행장을 읽으니, 우계선생(牛溪先生)의 문하(門下)에 나아가려다가 분분한 당론(黨論)으로 나가지 못하고 늦게야 급제(及第)하시었다. 용만선생(龍灣先生)은 말세(末世)의 인물이 아니라고 매우 칭찬하고 비록 재상 자리[정현(鼎鉉)]에 두더라도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다. 익성군(益城君) 홍성민(洪聖民)은 병이 위독했는데, 공이 甲午年(1594)에 급제[수립(樹立)]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지 못하고 죽는 것을 한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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