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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박세당 <불혹에 급제한 제자에게 '귀거래사' 들려준 스승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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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2-26 16:43 조회4,2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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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 "집안에 마소 세 마리를 먹일 한 단의 건초도 마련하기 어려운 지경이네. 자네 집에 여분의 건초가 있을 듯해서 노복을 보내네. 얻을 수 있겠는가?" (1696년 3월 16일)

"긴요하게 쓸 데가 있어서 그러니 참마 한두 단을 보내줄 수 없겠는가? 숯 서너 말도 얻었으면 하네." (1698년 3월 23일) 》

17세기 조선시대 정치·사상계의 거두 서계 박세당(1629∼1703)이 60대 후반 이후 제자 이정신에게 쓴 편지 중 일부다. 산과일과 참마, 숯은 물론이고 마소에게 먹일 풀까지 온갖 살림살이를 부탁하는 내용이다. 소론의 영수로 송시열과 맞서다 나이 마흔에 이조판서를 내버린 대쪽같은 성품이었지만 말년의 생활고를 홀로 감당하기는 벅찼다. 두 아들이 모두 숨지면서 일흔이 넘는 고령에도 일곱 명의 가족을 보살펴야만 했다. 극심한 흉년이 들었던 1690년대 말 이런 부탁은 웬만한 친척조차 들어주기 힘든 것이었지만 이정신은 성심껏 스승을 모셨다.





박세당이 제자 이정신에게 써준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 나이 마흔에 힘겨운 벼슬살이를 시작하는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담겨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박세당의 '서계유묵(西溪遺墨)' 가운데 이정신 등에게 쓴 편지를 번역해 처음 공개했다. 서계유묵은 박세당의 후손들이 생전 그의 시문과 편지를 모아 1750년경 낸 서첩으로, 사료로서 가치가 높아 2010년 보물 1674호에 지정됐다.





반남 박씨 종가에 전하는 서계 박세당의 영정. 17세기 조선시대 정치·사상계의 거두였던 그는 마흔 살에 낙향해 농업기술서인 '색경'과 '사변록' 등을 남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제공

김학수 한중연 국학자료연구실장은 "조선시대 문집이 주로 고인의 공적인 삶을 다룬 반면 서계유묵은 박세당의 인간적인 면모와 민낯을 솔직하게 담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들을 잃은 아픔을 피 끓는 부정(父情)으로 토해낸 글은 지금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죽은 아들을 지난 윤달 땅에 묻었는데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감당하기가 어렵네.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살고 싶은 마음은 더 줄어드니 이를 어찌 하겠나"(1686년 6월 5일)

큰아들 태유가 1686년 봄 39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숨진 뒤 이정신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비통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로부터 3년 뒤 작은아들 태보마저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다 유배를 떠나던 도중 목숨을 잃었다.

"이 몸에 죄가 쌓여 하늘의 화가 이토록 극심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네. 통곡하는 외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1689년 6월 5일)

산전수전 다 겪은 대학자로서 제자를 아끼는 마음도 남달랐다. 특히 불혹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이정신에게 낙향을 권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들려준 사연이 이채롭다. 청운의 뜻을 막 펼치려는 제자에게 왜 하필 스승은 귀거래사를 써 준 걸까.

'歸去來兮 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돌아왔구나! 바라건대 세상과 사귐을 쉬고 벼슬길을 끊어버리리라. 세상과 나는 서로 어긋났으니 다시금 멍에를 매어 무얼 구하겠는가).'

시를 쓴 도연명이 팽택 현령을 그만두고 낙향할 때 나이가 마흔. 공교롭게도 박세당이 관직을 버리고 양주 석천동(현 경기 의정부시)에 은거했을 당시 나이도 마흔이다. 평소 도연명을 흠모하던 박세당이 일부러 40세에 맞춰 낙향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이다. 조정에서 치열한 당파싸움을 겪었던 박세당은 벼슬살이의 괴로움을 일찍이 깨닫고 있었다. 김 실장은 "박세당은 제자인 이정신도 조정에서 수없이 부침을 겪을 것을 내다보고 언제든 버거운 짐을 내려놓을 것을 미리 당부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서계유묵

《서계유묵》상․중․하 3첩은 17세기의 유명한 문신학자 서계 박세당(1629-1703)의 필적으로 문인(門人) 이정신(李正臣, 1660-1727)에게 써준 것이다. 상첩(上帖)은 이정신의 시를 차운한 자작시와 자연에 대한 사랑과 혼탁한 세상과 멀리 한 중국의 시문이다. 중첩(中帖)과 하첩(下帖)은 각각 29통과 25통의 간찰로 이정신에게 보낸 것이 대부분이다(中帖1통 사위 남구만에게, 下帖 6통 박태보의 간찰). 1679~1702년에 쓴 것으로 대부분 『서계집』에 실리지 않았다. 그중 박세당이 이정신에게 중국 서화첩을 열람품평하게 한 것과 박태보가 <서계초상> 제작에 따른 제반사를 언급한 것이 주목된다.

상첩은 자연을 사랑하는 박세당의 심정과 그의 서예적 풍격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중첩ㆍ하첩의 간찰도 박세당과 이정신과의 사제 관계뿐 아니라 서화 감상과 초상화 제작에 관한 소중한 기록도 포함되어있다.




이정신(李正臣)            1660(현종 1)1727(영조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방언(邦彦), 호는 송벽당(松蘗堂). 명한(明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만상(萬相)이고, 아버지는 군수 봉조(鳳朝)이며, 어머니는 전라감사 홍주삼(洪柱三)의 딸이다.

     강릉참봉(江陵參奉)으로 1699(숙종 2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벼슬길에 나가 정언·수찬·응교·장령·헌납 등 삼사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뒤 1711년 동래부사로 외보(外補)되었으며, 다시 경직으로 돌아와 1716년 병조참의에 올랐고, 1721년 경종이 즉위한 뒤 호조참판에 배수된 뒤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연경에 다녀왔다.

돌아와 도승지에 임명된 그는 소론으로서, 조태구(趙泰耉) 등과 더불어 노론의 세력을 탄핵,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그뒤 병조참판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경기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해주에 있는 이관명(李觀命)이 찬한 인조대왕탄강구기비(仁祖大王誕降舊基碑)음기(陰記 : 비의 뒷면에 쓴 글)의 글씨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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