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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둔계공(遯溪公)의 호(號)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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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12-24 00:54 조회2,769회 댓글0건

본문

 

둔계공(遯溪公)의 호()에 대하여.

 

아산공(牙山)의 왕고(王考)이신 공주목사공(公州牧使公)과 선고(先) 경력공(經歷公)의 묘()를 철원부 둔계리(鐵源府 遯溪里)에 모시게 되자, ()은 한양(漢陽)에서 이곳 둔계리(遯溪里)로 이거(移居)하시게 됩니다. 그리하여 활당공파(活塘公派)의 큰집인 철원종중(鐵源宗中)의 시거조(始居祖)가 되셨고, 자호(自號)로 이곳 지명(地名)을 둔계리(遯溪里)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遯溪의 독음(讀音)둔계입니다.

물론 원음(原音)은 돈()이라고 표기(表記)하고 있으나, 은둔(隱遁)을 뜻하는 글자로 은 같은 同義語로 쓰이고 있습니다.

遯溪산골짜기로 은둔한다.는 뜻으로 으로 ()함이 마땅하고, 돌아가신 전 활당공파 도유사(前 活塘公派 都有司)인 찬경(贊京)님께서도 그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함은 둔계공(遯溪公)의 임진보에 번역하기를 호는 둔계라고 하였으나 방주(傍注)에는 돈계리라고번역되어 있어서 이러한 논란의 원인을 제공하는 빌미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밀히 살피지 못한 세보편찬이 아닌가 합니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도은재기(陶隱齋記)에서 자호(自號)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 삼한(三韓)은 그 기풍이 워낙 유아(儒雅)해서 예로부터 걸출한 인재가 많다고 일컬어져 왔다. 그리하여 드높은 풍도(風度)를 지니고 절세(絶世)의 기예를 소유한 이들이 각 시대마다 모자람이 없이 배출되었는데, 정작 ()’이라는 글자를 가지고서 자신의 호로 삼은 사람은 보기가 드물었다. 이는 출사(出仕)하는 것이 그들의 뜻이었기 때문에 숨을 은자를 말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은거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숨을 은자를 가지고서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아서였을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처럼 들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일까.

그러다가 근세에 들어와서는, 계림(鷄林 경주(慶州)의 옛 이름)의 최졸옹(崔拙翁 최해(崔瀣))이 자신의 호를 농은(農隱)이라 하였고, 성산(星山 성주(星州)의 옛 이름)의 이 시중(李侍中 이인복(李仁復))은 자신의 호를 초은(樵隱)이라 하였으며, 담양(潭陽)의 전 정당(田政堂 전녹생(田綠生))은 자신의 호를 야은(野隱)이라 하였고, 나 역시 목()이라는 글자 속에다 나 자신을 숨기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또 시중(侍中)의 족자(族子)인 자안(子安)씨가 이 대열에 참여하였는데, 그가 대개 숨을 곳을 찾은 것은 바로 ()’라는 글자를 통해서였다. ()라는 글자 속에는, () 임금이 바로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위에 알려지고, ()나라도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장차 떨쳐 일어나게 된 그런 의미가 깃들어 있는데, 이러한 내용들이 서책에 기재되어 있으니 충분히 살펴볼 수가 있다. [이하생략]

 

선현(先賢)들의 호()를 살펴보면 시대의 흐름을 느끼게 되는데 대개 같은 시대를 살고 간 선현들은 시대상을 따라 자호를 취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 같은 글자라고 하여도 인명(人名)으로 부를 때는 고유한 음이 있습니다.

어느 때인가 를 두고 인가 인가 하는 논쟁을 본적이 있는데, 人名으로 할 때는 로 독음(讀音) 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도 인명(人名)이라 독음(讀音)은 법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전을 살펴보면 인명의 음을 표기한 것을 종종 보게 됨으로 그런지 알고 있습니다.

201412월 세모에. 평택에서 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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