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난적 사변록 남구만 박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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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8 15:58 조회1,962회 댓글0건본문

서계공 장원급제 교지-1.jpg
※ 참고
사문난적
유교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한 사람
원래 유교 반대자를 비난하는 말이었으나 조선 중엽 이후 당쟁이 격렬해지면서부터 그 뜻이 매우 배타적(排他的)이 되어 유교의 교리 자체를 반대하지 않더라도 그 교리의 해석을 주자(朱子)의 방법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당시 중국에서 성행하던 육상산(陸象山)·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 같은 것도 조선시대에는 용납되지 않았다. 숙종(肅宗) 때의 대학자인 윤휴(尹稶)가 유교 경전(經典)을 주자를 따라서 해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석했다 하여 사문난적이라는 비난을 받은 것은 좋은 예이다.
사변록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 박세당이 지은 책
필사본, 14책이다. 《통록(通錄)》이라고도 한다. 먼저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사서(四書)를 주해하고, 이어서 《상서(尙書)》와 《시경(詩經)》에 대한 주석을 하다가 신병 때문에 《주역(周易)》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1책에 《대학》, 2책에 《중용》, 3책에 《논어》, 4·5책에 《맹자》, 6∼9책에 《상서》, 10∼14책에 《시경》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인 4서의 주해는 주자(朱子)의 학설을 비방했다 하여 조야(朝野)의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더욱이 《대학》 《중용》의 경우에는 원전의 장구(章句)와 편차(編次)까지 고치면서 주자의 학설에 반론을 펴는 한편, 자기류의 해석을 내린 나머지 일대 물의를 빚어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을 찍히기까지 하였다.
완사본(完寫本)이 저자의 후손인 박계양(朴啓陽)에게 전해지며, 그 복사본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세당(1629~1703)
본관 반남, 자 계긍(季肯), 호 서계(西溪)·잠수(潛戒). 시호 문정(文貞), 참판 정(炡)의 아들이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
1664년 부수찬(副修撰)으로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667년 수찬에 이어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장형(杖刑)을 받았다. 그해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예조참의 등을 지낸 뒤,
1694년 갑술옥사에 소론이 득세하자 승지로 특진하였다. 이어서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3년 중추부판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사변록(思辨錄)》을 저술,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에 반주자(反朱子)로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혀 삭직, 유배 도중 옥과(玉果)에서 죽었다.
사직(司直)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신원되었다.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 등보다 앞선 시대의 실학파 학자로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사변록》 외에 《색경(穡經)》 《서계집》 등의 저서가 있다.
남구만(1629~1711)
본관 의령(宜寧). 자 운로(雲路). 호 약천(藥泉)·미재(美齋). 시호 문충(文忠). 1651년(효종 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正言)을 지냈다. 1660년(현종 1) 이조정랑 ·집의(執義)·응교(應敎)·대사간(大司諫)·승지(承旨)를 거쳐, 1668년 안변부사(安邊府使)·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674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변방수비를 다졌다. 숙종 초에 대사성 ·형조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서인(西人)으로서 남인(南人)을 탄핵하다가 남해(南海)로 유배되고,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 ·부제학 ·대제학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83년 병조판서가 되어 폐사군(廢四郡)의 복치를 주장하여 무창(茂昌)·자성(慈城) 등 2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서인(西人)이 노소론(老少論)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1684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江陵)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 때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어, 1696년 중추부영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禧嬪) 장씨의 처벌에 대해 경형(輕刑)을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퇴관, 경사(經史)·문장을 일삼았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다.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그의 작품이다. 문집에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이경석(1595~1671)
본관 전주(全州), 자 상보(尙輔), 호 백헌(白軒), 시호 문충(文忠)이다. 정종의 후예이며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웠다. 1613년(광해군 5) 진사시, 161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북인이 주도하는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반대하다 취소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갔다.
그후 예문관 검열·봉교 등으로 진출하여 핵심 관직을 두루 거쳤고, 1632년 가선대부에 올라 재신(宰臣)에 들었다. 병자호란 끝에 인조가 척화신들을 배격하는 상황에서 도승지를 맡아 국왕을 모셨다. 이때 예문관제학을 겸하여 청나라의 승전을 기념하는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썼다.
1637년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이조판서를 거쳐 1641년 이사(貳師)가 되어 청나라로 가서 소현세자를 보필하였다. 이때 평안도에 명나라의 배가 왕래한 전말을 사실대로 밝히라는 청제(淸帝)의 명령을 어겼다 하여 청나라에 의해 등용이 금지되었다.
1644년(인조 22)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50년(효종 1) 조선의 반청정책이 알려져 청나라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국왕과 백관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영의정으로서 목숨을 걸고 책임을 전담하여 위기를 넘겼다. 국왕의 간청으로 처형은 면했으나 의주 백마산성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53년 이후 중추부영사에 올랐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국왕의 특별한 존경과 신임의 표시인 궤장(섟杖)을 하사받았다.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송시열(宋時烈) 등 명분을 앞세우는 인물들에 의해 삼전도 비문 작성과 같은 현실적인 자세가 비판받기도 했다. 이념과 정책은 숙종대의 소론으로 연결된다. 문집에 《백헌집》이 있으며 글씨에 능하였다.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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