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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추석 때에는 못
미치겠지만, 조금 있으면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해 또다시 전국적으로 대이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제사 문화의
지속에 대한 전반적인 고민과 논의가 있게 될 것이다.
흔히 어른들은 전통을 지키자고 할 것이고, 젊은이들은 혁파를 주장하리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다만,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뭔가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일종의 위기감은 노소를 막론하고 공유하는
상황이다.
옛날이라고 이런 고민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은 엄격한 유학의 법도가 지배하는 경직된 사회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의외로 유연하게 당시 상황에 맞도록 예를 변화시켰다. ‘성인도 시속을 따른다.’는 말이나, ‘가가예문(家家禮文)’이라는 말은
변화하는 과정에서의 미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하나의 수사(修辭)나 다름없었다.
어떤 제자가 기일(忌日)에 부군(夫君)과
부인(夫人)을 합제(合祭)해도 되는지 묻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답했다.
“옛날에는 이런 예가 없었다. 다만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선조(先祖)를 따른다는 말이 있다. 우리 집안에서는 전부터 함께 모셨으니, 지금 감히 가벼이 논할 수
없다.”
평생 송(宋)나라의 대학자 주희(朱熹)를 존모했던 퇴계다. 그런 그가, 주자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가례』의 예문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예법을 따른 것이다.
포저(浦渚) 조익(趙翼)이 지은 『가례향의(家禮鄕宜)』도 그런
고민의 결과이다. 『가례』의 내용 중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당시 민간에서 행해지던 예법 중에 타당한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
책이다.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에도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학자들의 견해가 이랬다. 지금 우리가 전통 예절이라고 하는 것도
무조건 원형 그대로 지켜온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야담에 전하는 이야기다. 어떤 유학자에게 이웃 사람이 와서
물었다.
“오늘 우리 집에 병아리를 깠는데, 제사를 안 지내야겠지요?”
집안에 새 생명이 탄생하면 제사를 안
지내는 풍습이 있어서였다. 학자는 안 지내도 된다고 말했다. 같은 날 다른 이웃이 와서 물었다.
“오늘 우리 집에 송아지가
났는데, 제사를 지내도 되겠지요?”
학자는 이번에는 지내도 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은 애초에 지낼 생각이 없었고, 한 사람은
있었기 때문에 대답이 달랐던 것이다.
정답은 없다. 본인들의 형편에 맞게, 유지하거나 개정하면 된다. 형식보다는 그 예에 담긴
정신의 본질과 정성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옛날 중국의 제후국들은
천자(天子)에게서 받은 달력을 종묘(宗廟)에 모셔 두고 매월 초하루에 살아 있는 양을 사당에 바치면서 고유(告由)를 한 뒤, 정사(政事)를 보는
관행이 있었다. 공자(孔子) 때에는 이런 제도가 이미 폐해졌는데, 양을 바치는 형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자공(子貢)이 이를 낭비라고 여겨
폐지하려고 하였는데, 공자가 반대하였다.
“자공아!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형식이나마 남아 있으면, 언젠가는 제대로 된 예(禮)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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