燕巖先生이 지은 사장(士章) 애사(哀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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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燕巖集)에는 애사(哀辭)가 세편이 실려 있다.
「이몽직(李夢直)에 대한 애사」와 「유경집(兪景集)에 대한 애사.」
그리고 「사장(士章)애사(哀辭)」다.
앞의 두 편은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에 실려 있고,
이 「애사(哀辭)」는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에 실려 있다.
그리고 두 편의 애사(哀辭)는 부탁에 의하여 쓰여 진 것이고,
이 「사장(士章) 애사(哀辭)」는 스스로 쓴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도타운 우정을 느낄 수 있다.
이 글이 쓰여 진 년대는 1770년을 전후(前後)한, 연암(燕巖)의 젊어서였던 것 같다.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에 실린 「맏 누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이나,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 묘지명」처럼, 애잔(哀潺)하고 수려(秀麗)한 맛이 떨어짐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간절함이 없기 때문일까?
「맏누님 증(贈)정부인(貞夫人)박씨 묘지명」도 두 편(篇)이 보이는데,
연암의 연구자(硏究者)들은 하나는 먼저 지었던 것을 후일에 다듬고 고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장(士章) 애사(哀辭)
사장(士章)이 죽어 염을 마친 뒤에야 나는 비로소 그의 방에서 곡을 하였다.
그림을 벽에서 떼어 내고 병풍과 장자(障子)를 치우고 서책(書冊)을 옮겼으며, 집기와 감상 품 따위를 바깥 마루에다 흩어 놓았고, 방 한가운데에 머리를 동(東)으로 둔 채 얇은 이불로 덮어 놓아, 마치 거문고를 집에 넣어 금상(琴牀) 위에 둔 것 같았다.
쓰다듬으며 통곡했더니 손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울컥 싫은 마음이 나서 방문을 닫고 나왔다. 뜰에는 왁자지껄하면서 뚝딱뚝딱 널을 짜고 이음매에 옻을 칠하니, 장차 우리 사장을 가두어 두려는 것이었다.
그의 벗 함원(咸原) 어경국(魚景國)과 풍산(豐山) 홍숙도(洪叔道)의 이름이 조문객 명부에 있었다. 문설주를 잡고 엎디어 울고 있는 그들에게 “두 분은 그리도 애통하시오?” 하고 물었더니, “너무도 애통하오이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호곡하기도 전에 눈물 콧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아! 사장(士章)은 명문가의 자제로 용모가 아름다웠다.
일찍이 필운대(弼雲臺)에서 꽃구경할 적에 그때는 바야흐로 석양이라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부채를 들어 해를 가리고 있었더니 사람마다 얼굴을 돌려 돌아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시(詩)는 전우산(錢虞山 전겸익(錢謙益))을 본받고 글씨는 미남궁(米南宮 미불(米芾)을 배웠으며, 그가 좋아하는 것은 보검(寶劍)인데 그 값이 왕왕 백금(百金)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
무릇 공작새가 먼지를 피하는 것과 화포(火布)가 때를 씻어 내는 것과 백지(白芷)와 백출(白朮)이 땀을 그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천성이라 하겠고, 원앙새나 금계(錦鷄)가 물에 서있는 것은 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사랑한 때문이라 하겠다.
당시의 노래 잘 부르는 자들을 좋아하여, 한밤중에 가야금을 타면서 매양 그들의 신성(新聲)을 변주(變奏)하는데 가락이 느릿느릿하게 변하여 처량하고 슬픈 회포를 드러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각혈 병을 앓은 지 두어 달 만에 죽으면서 뱃속에 아들을 남겼다.
그의 선세(先世)는 나와 조상이 같다.
애사(哀辭)는 다음과 같다.
나는 매양 모르겠네, 소리란 똑같이 입에서 나오는데, 즐거우면 어째서 웃음이 되고 슬프면 어째서 울음이 되는지. 어쩌면 웃고 우는 이 두 가지는 억지로는 되는 게 아니고 감정이 극에 달해야 우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모르겠네, 이른바 정이란 것이 어떤 모양이기에 생각만 하면 내 코끝을 시리게 하는지. 또한 모르겠네, 눈물이란 무슨 물이관대 울기만 하면 눈에서 나오는지.
아아, 우는 것을 남이 가르쳐서 하기로 한다면 나는 의당 부끄럼에 겨워 소리도 내지 못할 것이다.
내 이제야 알았노라, 이른바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란 배워서 될 수 없다는 것을.
[注] 사장(士章) : 박상한(朴相漢 : 1742~1767)의 자(字)이다.
그는 선조(宣祖)임금 때에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남일공(南逸公)의 적장(嫡長)후손으로, 현조(玄祖)는 금창부위(錦昌副尉) 태정(泰定)이며. 증조(曾祖)는 대사헌을 지낸 필명(弼明)이다. 그리고 조부는 영조(英祖)임금 때에 이조판서를 지낸 박사수(朴師洙)이고, 부친은 박만원(朴萬源)이고, 장인은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으로 영조(英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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